2018년 3월호 수까르노의 일생을 통해 본 인도네시아 현대사 – 수까르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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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수까르노와 하타, 수바르죠는 우선 코닝스플레인(지금의 메단 머르데까 거리)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를 찾아갔다. 상황을 확인할 목적이었지만 그곳은 텅텅 비어 있었다. 수까르노가 이때 느꼈을 황당함이 상상된다. 세 사람은 다시 인근에 있던 마에다 제독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마에다 제독은 달랏회합 성공을 축하하며 그들을 맞았지만 그 역시 일본항복에 대해서는 대본영의 확인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마에다 제독을 만나고 돌아가면서 수까르노와 하타는 다음 날 PPKI 회의를 열어 독립선언 준비와 관련사안들을 협의키로 했다. 그들이 PPKI 의원들에게 소환연락을 내면서 자카르타의 1945년 8월 15일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러나 다음 날 렝가스뎅끌록 사건이 벌어진다.
수까르니, 위까나, 차에룰살레 등을 비롯한 멘뗑31 조직의 청년들이 1945년 8월 16일 새벽 3시에 수까르노의 자택에 쳐들어와 수까르노와 하타를 납치한 사건이다. 청년들은 한낱 일본의 하수인인 PPKI를 거치지않고 즉각적인 독립선언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까르노와 하타가 어떤 형태로든 일본의 도움이나 압력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것이 그들을 납치한 이유였다. 당시의 일들을 훗날 회고록으로 정리한 라스미자 하르디에 따르면 수까르노는 당시 청년들이 순간적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여겼으므로 크게 분노하고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의감에 충만한 청년들은 스스로 누구보다도 애국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금방이라도 불붙을 것만 같은 격앙된 분위기에서 수까르노는 청년들을 따라나서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편 하타는 이 사건을 본질적으로 ‘납치’라고 보지 않았다. 수까르노의 메모에서도 청년들은 그날 정오 1만5천 명의 군중들과 학생, PETA 군인들을 결집해 도시를 공격,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청년들이 납치하다시피 수까르노와 하타를 렝가스뎅끌록에 데려간 것은 PETA와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를 자카르타에서 일단 두 사람을 소개시킨다는 측면이 컸다고 하타는 받아들였다. 실제로 차이룰 살레와 그 동료들은 직접 자카르타의 일본군을 공격해 정국 주도권을 잡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실제 병력을 움직일 PETA 소속 회원들이 그 설익은 봉기계획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밤길을 따라나선 것은 수까르노뿐 아니라 아내 파트마와티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장남 군뚜르도 함께였다. 렝가스뎅끌록에서는 그들에게 PETA 막사에 거처로 마련해 주었다가 나중에 한 화교의 집으로 옮겨 주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자카르타에선 PETA의 봉기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타는 12시30분 경 문과 앞뜰을 지키는 청년들에게 수까르니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들은 ‘그게 누구에요? 선생님?’하며 되물었다고 한다. 수까르니는 이 납치사건의 주범이었는데 말이다. 그들은 어떤 청년이 자기들을 이집으로 안내해 줘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이라며 멋적게 머리를 긁고 그곳을 떠났다. 하타는 그 모습에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감시하는 경비원들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 잠시 쉬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렝가스뎅끌록의 청년들은 그토록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었고 전혀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까르니가 그들을 찾아 왔다. 그들이 자카르타에 계획했다는 혁명이 벌어졌는지 하타가 물었지만 수까르니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 혁명은 벌써 실패한 거야. 자카르타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피해 있을 이유가 뭔가?” 하타는 그렇게 빈정거렸다. 수까르니는 상황에 대해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고 하타가 다른 질문을 더 던지기 전에 급히 방을 나가 버렸다.
자카르타가 감감무소식이자 수까르니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꾼또’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자카르타에선 평온한 하루가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 꾼또를 만난 PPKI 의원 아흐맛 수바르죠는 비로소 수까르노와 하타의 행방을 알고 그들을 자카르타에 데려오기 위해 서둘러 저녁 6시 경에야 렝가스뎅끌록에 도착해 청년들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자카르타에서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 우리 지도자들을 여기 묶어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날 아침 열릴 예정이었던 PPKI 회의에 대해 하타가 묻자 수바르죠는“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소집한 주체들이 다 여기 있는데요”라고 답했다. 수까르노와 하타가 납치되면서 8월 16의 PPKI 회합은 열리지 못했던 것이다.
수까르노와 하타가 꼬박 하루를 렝가스뎅끌록에 머무는 동안 청년들은 그들을 압박해 왜색을 완전히 배제한 민족주의적 독립선언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내놓으라고 다그칠 심산이었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권위에 압도되고 있었다. “혁명은 지금 우리들 손에 달려 있고 우리가 선생께 명령하는 입장인 것이요. 만약 선생이 오늘밤이라도 혁명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는 뭐? 어쩌겠다는거요?” 격노한 수까르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지르자 그 기세에 압도된 청년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거나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수까르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이번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전쟁과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요. 사이공에서 나는 이 일의 전반에 대해 이미 계획을 세웠소. 거사는 17일에 거행될 것이요.” “왜 17일인 겁니까? 왜 지금 당장이면 안되는 거죠? 왜 16일이면 안됩니까?” 수까르니가 그렇게 질문하자 수까르노의 대답은 사뭇 예상 밖이었다.
“나는 신비주의적 힘을 믿는 사람이요. 왜 17일이 내게 더 큰 희망의 비젼을 보여주는지를 이성적 잣대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선 17일이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게 느껴져요. 17은 고결한 숫자입니다. 우선 우린 지금 라마단의 와중에 있습니다. 가장 성스러운 기간이죠. 내일 17일은 금요일이에요. 레기(legi)의 금요일. 행복의 금요일, 성스러운 금요일. 꾸란도 17일에 인간들에게 주어졌죠. 무슬림들이 17번을 주기로 기도를 올리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17이란 숫자가 갖는 고결함은 결코 인간이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화는 라스미자 하르디의 1984년자 저서에 따른 것인데 늘 독실한 무슬림처럼 보였던 수까르노가 신비주의적 취향을 드러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청년들에게 다짐을 하며 다독거린 후 비로소 수바르죠와 함께 렝가스뎅끌록을 떠난 수까르노 일행은 먼저 마에다 타다시 제독의 멘뗑저택을 들러 거기서 밤을 세워 독립선언서 문구를 다듬어 준비한 다음 1945년 8월 17일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수까르노 자택으로 돌아왔다.
독립선언문은 1945년 8월 17일 아침 이까다 광장(지금의 모나스광장)이나 뻐강사안 동로(지금의 쁘로끌라마시(선언)도로)의 수까르노 자택에서 수까르노와 하타가 함께 읽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까다 광장엔 대규모 민중집회가 예상되어 일본군이 삼엄한 경계 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시민소요와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해 수까르노의 자택이 선언장소로 최종 확정되었다. 하타는 이날 새벽 언론계통에 종사하는 청년들에게 독립선언문을 가능한 많이 인쇄해 전국에 뿌려달라고 요청했음을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날 아침 내내 PETA와 청년그룹들은 급조된 유인물을 뿌리며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이날 수까르노 자택의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가운데 마이크로폰과 확성기가 설치되고 뒷뜰에서 대나무를 잘라와 급조한 국기게양대가 테라스 옆에 세워지는 등 부산하기 이를 데없었다. 수까르노의 부인 파트마와티가 손수 바느질한 국기도 준비되어 있었다. 훗날 분데라 뿌사카(Bendera Pusaka)라고 불리게 되는 이 국기는 그 크기나 모양이 훗날 정착될 표준과는 많이 차이나지만 주어진 여건과 재료를 이용해 최선을 다해 제작한 것이었고 오늘날에 역사적 의미를 지닌 유물이 되었다.
독립선언이 있을 것임을 전해 들은 시민들도 모여들면서 수까르노의 자택엔 500여 명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뺵빽히 들어섰고 어떤 이들은 일본군이 언제 난입해 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선언식은 시작되지 않았다. 수까르노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선언문 작업을 하고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이 화근이 되어 건강상태가 최악이었고 똑같은 일정을 소화하고 새벽녘 잠시 귀가했던 하타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조급증을 참지 못한 청년들은 빨리 선언문을 낭독하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모하마드 하타 없이는 선언문 낭독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타가 흰색 계통의 복장을 하고서 도착했고 수까르
노는 하타의 도착을 환대하며 비로소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 역시 흰색 계통의 옷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아침 10시 정각 자택 행사장 테라스에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이 행사는 어떤 특별한 형식이나 순서를 갖추지 않은 단촐한 것이었다. 단지 PETA 군인이었던 라띠에프 헨드라닝랏이 장내를 관리했는데 그는 수까르노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 청년들에게 손짓해 모두 일어나도록 했다. 그들이 일어나자 라띠에프는 수까르노와 모하마드 하타를 몇 걸음 앞의 마이크로폰으로 나오도록 요청했다. 수까르노는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간단한 사전 연설을 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것이 1945년 8월 17일 수까르노의 자택에서 있었던 독립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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