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 신성철 칼럼[인도네시아 자연재해 4종세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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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 살다 보면 자연재해 관련 뉴스가 일 상처럼 이어져 재난에 무감각해지기 일쑤다. 하지만 요즘 발리섬 아궁화산 분화 소식에 뒤숭숭한 마음이 들면서 현지에 살면서 자연재해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불편한 기억이 떠오른다.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발리 섬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냐? 아궁화산은 발리섬의 유명 관광지에서 30km 이상 떨어 져있어서 안전하다는데?”라며, 여행 계획을 강행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채근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자연재해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격이 될 수 있다. 지진과 화산 분출, 홍수, 연무 등 다양한 자연재해를 직접 경험한, 나는 “화산과 지진 등 자연재해는 언제 발생할지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만큼 당연히 일정을 조정하는게 좋겠다”며 “당장 화산재가 분출 하기 시작하면, 발리 덴빠사르공항이 폐쇄되면서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참으로 자연 앞에선 인간이 한없이 작아진다.
2009년 9월말 발생한 서부수마트라 주 빠당 지역 지진을 취재하기 위해 재난 현장으로 급파되어 서둘러 짐을 꾸렸다. 어렵게 구한 비행기편으로 지진 발생 사흘만에 도착한 빠당시 전역은 지진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빠당 미낭까바우 국제공항에 도착 했을 때만 해도 간간이 현지 구조대원들의 모습이 보일 뿐 참극이 덮친 도시라는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빠당시 도심으로 근접할수록 곳곳에 폭삭 주저앉은 건물이 늘면서 리히터 7.9 규모의 강진이 휩쓸고 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300여명이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빠당 시 중심지의 암바짱 호텔 주변에는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고 앰뷸런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011년 건기가 절정에 달하던 9월 어느 날,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동부자바주 내륙에 우뚝 솟은 브로모 화산에 올랐다. 브로모 화산은 살아 있는 듯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우리가 묵을 호텔은 앞서 뿜어낸 화산재가 쌓여 마치 눈이 수북이 덮인 것 같았다. 한 호텔 관계자는 “아직 주분화구에서 가스를 분출하고 있어 다음날 주분 화구 관광을 허용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다행스럽게, 해가 떨어질 즈음에 주분화구를 개방할 것이라고 말해 다음날 아침 목적지까지 갈 지프차를 예약했다. 주분화구로 오르는 길은 입구부터 관광객들로 꽉 차서 걷는 속도가 조절이 안 되고 밀려다녔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잠바와 모포를 뒤집어 쓰는 등 화산재와 유독가스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 했고, 심지어 방독면을 쓴 서양사람들도 보였다.
주분화구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화산가스가 독하다며 일찌감치 포기했으나, 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카메라를 메고 홀로 200여 개의 계단을 올랐다. 흔히 브로모를 영산(靈山)이라 부르는데 정말로 내가 신을 만날 뻔 했다. 주분화구에서 내려왔을 때 잿빛 화산재가 수북하게 덮인 칼데라에서 호흡곤란 증세가 악화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다행이 일행 중 한 사람이 흡입기관지확장제를 갖고 있었던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97년 인도네시아서는 엘니뇨로 인한 혹독한 가뭄으로 수백만 헥타르(ha)의 숲이 불타고, 연무가 주변국으로 확산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 인접국 들이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당시 빠뿌아 주 오지에 있는 목재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사업장 주변에 나무 타는 연기로 하늘이 뿌옇고 메케한 탄 내와 후덥지근한 열감으로 고통스러웠다. 나날이 심각해지는 연무 속에 갇혀 마른 기침을 하며 3개월 넘게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내리길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2002년 2월 자카르타 대홍수 때는 자카르타 서부지역에 살았다. 홍수로 도로가 막히던 날 우리 집에서 세 가족이 모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 10시경에 손님들이 출발했는데, 우리 집에서 15 분 거리에 사는 친구 가족은 4시간이나 걸려서 새벽 2시에 집에 도착했고,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사는 후배 가족은 아파트가 침수되어서 아예 집에 못 들어가고 다른 집에서 밤을 지샜다. 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고 땅에선 누런 황토물이 급격하게 차 올랐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건축할 때 지반을 1.5미터 이상 높였기 때문에 물에 잠기지 않 았지만, 아파트 단지 밖으로는 성인 허리가 잠길 정도로 물이 차 며칠 간 외출을 못하고 고립됐다.
지난 9월 19일 멕시코에서 2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규모 7.1의 강진이 발생한데 이어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대만, 일본 등 이른바 ‘불의 고 리’에서 지진과 화산 분화 움직임이 잇따르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각지의 지진과 화산 활동간 상관관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모두 ‘불의 고리’ 로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 인근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질학계에서는 이 일대가 판으로 이뤄진 땅덩어리들이 부딪히는 곳이어서, 지진.화산활동이 잦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거나 세상에 대해 오만해질 때쯤 자연재해를 한번씩 겪으면서 나와 내가 사는 세상을 돌아본다. 아직도 지진, 화산, 쓰나미, 태풍 등 자연의 불청객을 물리칠 방안을 딱히 갖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파괴된 자연은 자연재해를 증폭시켰다. 무분별한 도시개발은 홍수와 지진 피해를 더 크게 키웠고, 농지를 개간 하기 위해 놓은 불은 연무로 돌아왔다. 브로모 화산에서는 입장료와 자동차 임대료 등 경제적인 이유로 현지 관광당국이 화산재 분출이 위험한 수준 이었음에도 주분화구의 입산을 허용했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험에 처했다가 살아나면서, 나 자신도 자연과 세상을 좀더 겸손하고 신중하게 보게 됐다. 이제 세 달이 지나면 한 살을 더 먹는 다. 여전히 계획만하고 실천하지 못한 일들이 머리 한 켠에서 삐쭉삐쭉 올라오고 몸은 쉬라고 아우성친다. 순리대로 가볍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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