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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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향수, 그것은 심한 두통과 고열을 동반 하는 감기처럼 지표면을 부유하며 일렁이는 아련 함이있다. 재단되지 않은 방목 천을 자르고, 정 갈한 박음질로 가장자리를 갈무리하는 것만큼이 나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돌아가지 않 을 곳을 미리 정해두고,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고 치졸한 변명으로 포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국경 의 남쪽에서 더 남쪽으로 꽤 먼 시간의 하늘 길을 날아야만 당도할 수 있는 술라웨시섬의 최남단에 위치한 주도 마카사르에서 체류하는 나는 이 도시 에서의 심플한 삶이 제법 만족스럽게 여겨진다. 물론 행정적으로도 유한한 삶이지만 그것은 이미 유한한 범주에 있는 우리의 전 생애만큼이나 제한 적인 것이기에 큰 불만은 없다.
“다시 인도네시아로 갈 거에요.” 내가 건조한 어투로 말을 꺼냈을 때, 부모님의 표 정은 달갑지 않아 하셨다. “왜 또 가려고 하니? 이제 한국에서 터를 잡아야지.”
아버지는 한심스러운 아들의 결정에 깊고 깊은 한숨으로 안타까움과 반복된 이별에 대한 아쉬움 을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족자카르타에서 돌아 온 지 정확히 반년 만에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아들의 모습을 찬성할 리 없었다. 나로서도 짧은 한국 생활을 다시 정리하고 짐을 꾸려야 하 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한번 둥지를 떠 난 새는 다시 돌아와도 비좁고, 익숙한 둥지의 불 안과 초조로 다시 어떤 식으로든 분리될 수 밖에 없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길 위에 서기로 결심하였다. 그 어느 지붕 밑도 아닌 길 위에 말이다.
길 위에 서면 편안한 마음이 든다. 탁 트인 공간 은 언제나 솔직하고, 진실한 공간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좌로든 우로든 어 느 방향에서든 길은 또 다른 길을 따라 흐르고, 어 디선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누군가와 어떤 도 시 혹은 공간과 만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위의 모든 것은 각각의 선율이 오선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음절을 만들 고 마디를 나누고 완성된 악보가 되어 대중가요로, 오페라로, 뮤지컬로 그 옷을 자유자재로 갈아입으 며 태어나는 음악처럼 다양한 풍경과 시절을 우리 에게 보여준다. 때론 그것이 미완성일지라도 말이 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완벽할 수 없으므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딱딱한 아스팔 트 위에 있었던 것 같다. 내리쬐는 여름의 태양 때 문에 이글거리며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를 따라 오 래도록 그 길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이 어린 시절 애써 만든 눈사람을 모 조리 사라지게 한 범인인지도 모른 체 말이다. 언 제부터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된 기억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금 아득히 먼 마카사르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가끔 은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도 필요한 인생이 아닐까? 지난해 연말 어느 이른 아 침, 무심코 한국으로부터 들려 온 몇 통의 문자가 무더위에 지친 나의 게으름을 흔들어 깨웠다. 몇 몇 친구들과 부모님에게서 예의 대단한 뉴스인 양 첫눈이 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지 금 살고 계신 아파트 단지 깡마른 나무에 얄팍하 게 내려앉은 하얗고 청순한 순백의 첫 눈 꽃송이 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오셨다.
물론 첫 눈 소식은 언제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설 레게 만든다. 그것은 뭐랄까 문득문득 생각해도 어 릴 적 누나와 함께 보던 미국 디즈니 만화의 한 장 면처럼 금방이라도 깊은 숲에서 우아한 공주가 나 타날 것만 같고, 아름다운 환상의 하모니로 노래 하는 파랑새의 지저귐이 들려올 것만 같다. 그리 고 지금 창 밖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적도의 후끈함
이 그 사진 한 장으로 인해 어느새 얼음 위를 딛고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은 겨울을 경 험해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명료한 기억 때문이지 않을까. 한 순간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들려온 겨울 의 소식이 나 같은 무색무취의 사람에게도 영어로 는‘홈식(Homesick)’이라고 하는 고국에 대한 ‘향수병’아니 엄밀히 말하면 ‘우리 집 냄새’ 에 대한 그리움을 은근히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때로는 너무 정직하게 되돌아오는 계 절의 순환을 저버리고 물러섬 없는 여름의 한가운 데를 택한 것이다. 고국의 싱그러운 봄을 느껴 볼 겨를도 없이 벌써 후덥지근한 여름을 지나 만개한 가을의 단풍 숲과 떨어진 낙엽이 품은 쓸쓸한 낭만 들을 뒤로하고 이미 ‘뜨겁다’라고 느끼는 표면 적 한계를 넘어선 적도의 어디쯤을 밟고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지금쯤 한국의 가족들은 곧 영하의 첨 예한 겨울의 송곳바람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지 척에 사는 누나와 매형, 그리고 항상 까르르 웃는 개구쟁이 삼형제 조카들의 모습도 뇌리를 스쳐 오 는 것이다. 그러한 잠재된 그리움이 오늘 보내어진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은 좁힐 수 없는 시.공간의 물리적 간극인데 그럼에도 길 위에 있는 한 우리 모두는 다시 어느 지점에서 언젠가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든 그리움이 화석으로 남 는 것은 결국 그것이‘해피엔딩’이든,‘새드엔 딩’이든 이미 지나간 과거 형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고 또 축복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리움’ 혹은 ‘향수(鄕愁)’라는 말이 더 매력적이고 희 망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곳은 언젠가 돌아가야만 하는 아득한 기억과 추억으로 가득한 개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 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흐릿한 기억 으로 잊혀지기 전에 길 위에서의 모든 여행을 끝 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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