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01 비 오는 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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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곳, 자카르타는 비가 내린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비가 오면 먹고 싶은 것이 더 많아 진다.
뜨끈한 어묵도 먹고 싶고 해물파전도 생각난다. 해물파전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엄마표 해물파전 이 최고다. 온갖 해산물을 다 넣어서 만든 파전이 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노릇노릇하게 갓 구워진 해물파전을 후후 불면서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다. 특히 오징어 와 쪽파의 환상적인 조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갓 담근 엄마표 김치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김치 한 포기를 꺼내와 파전과 함께 먹으면 정말 맛있다. 당연히 김치는 손으로 쭉쭉 찢어 먹어야 제 맛 이다.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새해가 다가오니 유난히 한국이 그립다. 한국에 서는 오늘처럼 비가 와서 날씨가 쌀쌀해지면 길거리에 파는 어묵을 먹곤 했었다. 어묵을 한 입 베어 물고 뽀얀 김이 나오는 노르스름한 국물까지 후루룩 마셔주면 온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떡볶이도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일명 ‘물떡볶이’로 빨간 국물이 자작하게 있는 것이다. 한 때 나는 우리 동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남의 동네에 원 정을 가기도 했다. 주말마다 어김없이 참새가 방 앗간을 들리듯 들리다보니 나는 자연스레 그곳의 VIP 고객이 되었다. 갈 때마다 아는 체를 해 주시며 나의 안부까지 물어봐주시는 아주머니의 센스 도 알아줘야했다.
가끔씩 아주머니께서는 나에게 새로 만든 튀김을 맛볼 기회를 주시기도 하셨다. 먹어보고 튀김 맛을 평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맛보기용 튀김은 공짜였다.
그 순간만큼은 절대 미각을 가진 미식가로 변신 하여 얼마나 성심 성의껏 시식을 했는지 모른다. 시식 후에는 아주머니께 튀김의 촉촉함과 식감 등을 디테일하게 설명해 드렸었다. 시간이 지난 후 시식한 튀김이 정식 메뉴로 팔릴 때 얼마나 뿌듯 했는지 아주머니께서 아실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새 튀김 첫 시식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오지랖 넓게, 새 튀김이 얼마나 팔리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를 묻기도 하였다. 새 튀김 반응이 좋다는 말씀을 듣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소 리를 질렀던 기억도 난다. 그곳은 다양한 튀김을 골라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좋아하는 새우튀김이 나 김말이 등을 섞어서 아주머니께 건네면 꼭 한 번 더 튀겨서 따스하게 주실 뿐 아니라 다른 튀김 을 은근슬쩍 더 넣어주시면서 VIP 고객 대우를 후 하게 해 주셨다. 남들과 같은 가격, 다른 양이었다. 그런 아주머니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친구들을 데 리고 자주 그곳에 들렸던 것이다.
그렇게 잔뜩 먹고 나면 배도 부르고 나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만화책을 보면서 방안에서 뒹굴어야 하 기 때문이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방에서 만화책을 읽던 그 때 온돌의 따스함이 느끼지는 방 안에서 시원한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부러울 것 이 없었다. 당시 내가 빌려 읽던 만화는 대개 순정 만화였다. 옆 턱 선이 곱게 뻗은 그와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눈망울을 가진 예쁜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지. 그립 다. 그 때 그 시절이. 그런 날은 잔뜩 먹어 볼록해 진 내 배도 그다지 싫지 않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학창시절에는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는 것도 무척 즐겼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비를 가장 사랑했던 시절이었으리라. 비가 오기만 하면 친구들과 몰려 나가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옷이 다 젖어 생쥐 꼴 이 되어도 개의치 않았다. 비에 젖은 모습이 웃기 다면서 서로를 보며 얼마나 깔깔댔는지 모를 일이 다. 그때는 친구들과 함께 비를 맞는다는 사실만 으로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사소한 일도 큰일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시절이라 작은 소문에도 무척 민 감하게 굴었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가다가 어떤 남학생이 우산을 씌워주었 다면 다음날에 학교가 난리가 날 정도였다.
최고의 관심사는‘남학생이 잘 생겼나’였다. 그 남학생이 훈남이라는 소문이 들려오기라도 하 면 ‘까약’ 소리를 지르면서 난리법석을 떨었었다. 그렇게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괜히 우산 속 주 인공처럼 내가 설레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도 비 오는 날에 첫사랑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비를 사랑하는 남자는 굉장히 로맨틱할 것이라는 착 각 속에서 말이다. 물론 요즘은 예전처럼 그렇게 비를 맞고 다니지는 않는다.
우산이 없어 어쩔 수 없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감기 들까 겁이 나기도 하고 산성비라는 생각에는 온몸으로 비를 맞아본 일은 기억조차 없다. 게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빗물이 옷에 튈까, 신 발이 젖을까 얼마나 조심하는지 모른다. 비 오는 날 운전을 해야 하면 신경부터 날카로워진다. 빗길 운전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에 찌든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 내리는 풍경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가 ‘축축하게’ 내 리는 날은 제외다. 반드시‘촉촉하게’ 오는 날이 어야 한다. 축축하게 쏟아지는 비는 질퍽해서 싫고 촉촉하게 오는 비는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준다. 그건, 순전히 내 기분 탓이다.
이 순간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떨어지는 빗 방울을 바라보니 괜히 센티한 기분이 들어 우아하 게 커피를 한 잔 마셔 줘야 할 것만 같다. 오늘 자카르타에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타국 의 빗소리가 내 마음에 서서히 젖어든다.
곧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아오고 있다. 새해 는 붉은 닭띠 해라고 한다. 처음 이곳, 인도네시아 에 왔을 때 나는 Cibubur에 거주를 했는데, 인근 집에서 닭을 키우고 있어서 아침마다 우렁찬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깨곤 했었다. 특히 허름한 닭장 이 아닌 고급스런 새장에서 닭을 키우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는 닭을 아끼는 이들의 마음 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닭은 머리가 좋고 상당 히 부지런하다고 한다.
심지어 선경지명까지 있다고 하니 새해에는 이 런 닭의 기운을 듬뿍 받아 모든 한인들에게 좋은 일들만 가득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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