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2 기억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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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온 기억의 숲 에서 그리움과 추억을 되새기는 일인 것 같다.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은 현재의 삶에 무한한 원 동력이 되어 주기도 한다. 유년 시절의 슬픈 기억 은 한편의 삽화가 되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있 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엄마가 사온 새 운동 화 생각에 잠을 설치다 겨우 새벽녘에야 깜빡 잠 이 들었다. 뒷마당 우물가에 햇살이 조각조각 숨 어들고 잠결에 귓불을 스치는 손길을 느끼며 퍼뜩 잠이 깬다. 손끝에서 묻어나는 익숙한 냄새, “일 어나야지, 오늘 입학식 날이잖아!” 정이 잔뜩 묻 어 있는 아버지의 나지막한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는다.
햇살이 마루 끝에 잠시 놀다간 오후에 엄마는 나 의 목에 보자길 하나 두르고 분무기로 폭폭 머리 카락을 적셨다. 한 손으론 앞머리를 꼭꼭 누르며 반듯하게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세수를 하고 몇 번이나 물을 발라 공들여 빗질을 해봐도 영 마 음에 들지 않는다. 첫 입학을 앞두고 어려운 살림 에 엄마가 사주신 토끼 무늬가 새겨진 노란 스웨 터를 입고 세 살 박이 동생과 함께 동네 사진관에 서 사진도 찍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기분이 좋 아져 의젓한 학생처럼 어깨를 쭉 펴며 싱긋 웃어 본다. 아버지는 나를 덥석 안아 자전거 뒤 군용 담 요를 깔아놓은 짐칸에 앉힌다.
집과 병원만 거의 오가던 아버지와 나의 첫 번째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나, 동생은 큰방에서, 잦은 기침소리가 떠나지 않 던 아버지는 작은방에서 혼자 지냈다. 언제부턴 지 서쪽 창으로 붉은 노을이 지는 작은 방에 늘 혼 자 계셨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마음에도 하염없이 슬퍼 보였다. 아버지의 잦은 기침 소리는 옹색한 살림 구석구석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가끔 약 심 부름을 시켰고 때론 잔돈푼을 건네주면 군것질로 허기진 정을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가는 일 말고는 거의 외출이 없으신 아버지가 나의 첫 번 째 입학식에 따라 나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야 윈 등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둘만의 나들이가 제발 깨지지 않기를 두 눈을 꼭 감고 빌었다. 희뿌연 흙먼지가 날리는 학교 운동 장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아이들은 천방 지축 인파 속을 헤집고 다닌다.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겨우 줄을 맞추 어 선다. 추운 날씨 탓인지 코를 훌쩍이며 부모를 찾아 울어대는 아이도 있었다. 모래 바람이 너울 처럼 번지는 삼월, 입학식이 진행되는 운동장 어 디에도 봄은 아직 없었다. 식이 시작되고 행여 아 버지를 돌아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봐 두 려움에 마음속으로 주문을 건다.
열을 센 뒤 돌아보면 나를 보고 계실 거라는 믿음 을 가지고 천천히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아버진 자전거 짐칸에 올라 타셨는지 키 큰 미루나무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줄곧 나만 바라보고 있었던 듯 눈이 마주치자 얼굴 반을 덮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 고 풍차처럼 팔을 휘휘 저으신다. 나 여기 있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듯 입가에 환한 웃음을 매달고 계신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바늘에 콕콕 찔린 듯 아프다. 햇살을 받으며 무심 히 신발코로 땅을 파 흙먼지를 일으키며 톡톡 발장 난을 친다. 일찍 슬픔을 배우는 중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여윈 아버지 등에 얼굴을 묻 으며 비릿하고 시큼한 약 냄새가 홍시 삭는 냄새 같다고 생각한다.“아버지 내 달고나 한 개 사주 라”“그래, 알았다, 사 주고말고”. 하며 자전거 페달에 힘을 준다. 너무 기뻐서 지나가는 또래들 에게 자랑 삼아 말한다.‘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 버지가 달고나 사 준다’. 아무도 묻지 않는 말을 큰소리로 외쳐본다. 연탄불에 국자를 올리고 달고 나에 소다를 조금 넣어 잘 부풀어 오르면 입이 델 것 같이 뜨겁다. 먼저 한 숟가락을 떠서 작은 입으 로 호호 불어 아버지 앞에 내민다. 어린 마음에 달 고나 라도 많이 먹으면 왠지 아버지 기침이 줄어 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채는 탓에 한 숟가락 받아먹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활짝 웃으며 스스로 대견한 듯 묻는다.“맛있지? 아버지! 진짜 맛있지?”그날 저녁 작은 방에서 들리던 기침소 리는 평소완 다르게 더욱 심해졌고 집안의 분위 기는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우울해지고 있었다.
내일도 아버지하고 학교 갈건 데, 내 마음은 아랑 곳 않고 엄마의 걱정 섞인 잔소리는 문지방을 넘 어 가족들의 귀를 긁는다. 이불 속에서 숨을 막고 소리죽여 운다.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작은 방에서 울리는 기침소리는 목구멍을 삼키는 울림이 되어 문지방을 넘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 작은방 앞에서 눈치부터 살피는데“학교 가자 어 서 준비해라”문틈을 새어 나오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뻤지만 짐짓 엄마의 기분까지 생각하느라 제법 태연한 척 속내를 감춘다. 아버지는 가끔 손님이 오시면 꺼내 입는 자주 빛 잠바를 입으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 보기 좋다. 목도리까지 하니, 우리 아버지 참 미남이구나 싶어 어깨가 으쓱해진 다. 며칠간 아버지와의 나들이에 때론 구멍가게에 서 호떡을 사먹기도 하고 뽑기도 하며 달달한 행 복에 젖어 들었다.
엄마 몰래 아버지와의 비밀들이 하나, 둘 쌓여가 는 기쁨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는 달 리 아버지의 기침은 점점 거세져 밤새 엄마의 간 호를 받아야 했다.
닷새째 되는 날 아침, 첫날부터 느꼈던 조마조마 한 느낌이 현실이 된 것이다.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몰라 아픈 몸을 억지로 견 디며 입학식에 따라 나선 것을, 그것으로 아빠와, 나만의 나들이가 마지막이 되었다. 내일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는 그렇게 원하는 날이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 가 얼마나 아픈지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왠지 물어보면 갑자기 눈물 이 날 것 같아 괜 시리 자전거를 발로 한번 툭 차 본다. 문간에서 축 처진 누렁이 귀에 대고“엄마 미워 아버지도 미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누렁 이 귓가를 적신다.
잠시 기억의 저편을 떠돌고 있는데, 갑자기 딸아 이가 나를 크게 부른다.
사진첩에 있는 낡은 흑백사진 한 장에서 애달픈 그리움과 회한으로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세월의 강을 건너 여덟 살 아이로 돌아갔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내 유년 시절의 사진 한 장은 그렇게 생겼다. 사진 속의 나는 우울하고 어수룩 해 보이는 눈가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은 슬픈 모습이다. 딸아이는 엄마는 어릴 때도 눈 꼬리가 내려가 순해 보인다는 둥, 머리모양은 왜 이런가 등, 놀리며 웃는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사 랑했다. 오랜 병고로 자식을 욕심껏 사랑하고 껴 안아줄 수 없었던 고통의 무게를 어찌 견디셨을까? 우리 곁을 떠날 때 엄마와 나의 손을 꼭 잡고 남긴 한마디‘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날 마 지막으로 잡은 아버지 손은 더없이 따뜻했다. 사진속 내 어린 얼굴 위로 아버지 얼굴이 겹쳐지나 가고 내 유년시절의 슬픈 삽화와 함께 그리운 시 절인 또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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