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7월의 행복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뜰 - 김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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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까라왕(karawang), 이곳에 위치한 남편이 다니던 회사 사택에서 우리 가족의 해외생활은 시작되었다. 낯선 땅에서 부딪치는 이국적인 문화는 털털한 내성격 탓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공간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가령 회사 직원들과 회식을 할 때 자카르타에있는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일은 대전에서 서울로 여행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밥 한 끼 먹자고 왕복 네 시간을 차에서 보내야 하다니......’
늘 이렇게 중얼거리며 남편을 따라 나섰지만 우리보다 먼저 온 선임들은 적응이 되었는지 이에대해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 나라가 얼마나 넓은지 조금씩 깨달아 가고, 다른 섬으로 여행을 다니며 인도네시아의 광활함에 기가 질리기도 하였다.
지금도 이 땅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20년 넘게 살며 보아 온 공간 중 좁지만 가장 아름다운 곳을 소개하고 싶다.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뒤뜰이다. 금잔디 밭 주변으로 야자나무 일곱 그루, 깜보자나무 네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곳, 오른쪽으로 미끄럼틀, 그네, 시소 등이 자리 잡고 그 옆으로 테니스코트 입구가 보인다. 오른쪽 위편으로는 오각형의 큰 오두막이 있는데 오두막 가장자리엔 시멘트로 만든 긴 벤치가 빙 둘러져 있다.
오두막과 정원 사이로 바비큐와 수도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바닥에는 대형 보도블록이 깔려져 있다. 그 보도블록을 뚫고 나온 서너 그루의 나무에는 가로등이 열매처럼 달려 있다 밤이 되면 화사한 꽃으로 피어난다.
하루 중 가장 먼저 이곳의 문을 여는 건 이른 아침이 반가운 새들이다. 그들은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목청도 가다듬고 세수도 하고 깃털도 다듬는다. 그러다 해가 올라오기 전 먹이를 찾으러 서둘러 떠난다. 낮 동안 함박 피어 있다 밤에 생을 정리하는 깜보자 꽃잎들, 그들의 여운은 참으로 처연하다.
잔디위에 마지막 꽃자리를 펼쳐 놓기 때문이다. 요즘 골프에 빠진 이웃 대만 아저씨의 알록달록한 골프공이 날아와 또르르 그 자리 위에 머문다. 이 사람은 거의 매일 아침, 10년쯤 입은 듯 헐렁해진 메리야스에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골프피칭 연습을 한다. 이곳에 등장하는 유일한 복장이 불량한 존재이다. 그 다음엔 부지런한 주인을 만난 강아지들이 아침 산책을 한다. 밤이 편안했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주인을 따르다 평소 즐겨 찾는 곳에
서는 뒷다리를 들고 편안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들의 스트레스도 함께 배설 되리라.
햇볕이 순한 오전엔 유치원에도 가지 못할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유모와 아침 놀이를 한다. 아장아장 잔디밭을 걷다가 미끄럼틀 위에서 소꿉살림을 차리기도 한다. 그러다 금방 싫증을 내고 칭얼거리면 유모는 이내 살림을 걷고 아이 손을 끌며 퇴장해 버린다. 햇빛이 더 올라오기 전, 키 작은 청소부는 단정한 유니폼에 비와 쓰레받기 그리고 저보다도 큰 쓰레기통을 끌고 나타나 정겨운 비질 소리를 내며 깜보자의 마지막을 거두어 간다. 이로써 오전의 마지막 등장인물이 된 그는 깨끗이 뒷정리를 하고 떠난다. 이렇게 말끔해진 잔디 무대 위로 태양은 지상에 올라온 그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뜨겁게 각인 시킨다. 야자수의 화려하고 촘촘한 빗살무늬를 잔디위에 빚어 놓는 솜씨는 언제나 감탄스럽다. 그의 몸이 뜨거울수록 야자 잎은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긴 정원가위를 들고 가끔씩 나타나는 정원사 외에 평일 한낮에 이곳에 들어오는 이는 거의 없다.
열기가 수그러진 오후엔 아이들의 고함소리, 웃음소리로 활기가 돈다. 고만고만한 사내 녀석들이 공을 가지고 나와 차기도 하고, 새초롬 빗은 머리에 학교 유니폼을 입은 여자아이들은 그네에 앉아 몸을 빙빙 돌리며 야무진 입으로 쉴 새 없이 조잘 거린다. 이 시간에 운동을 나서는 늙수그레한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리드미컬하게 주변을 걷는다. 가끔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튀어 나오는 어린애들의 자전거에 멈칫하기도 한다. 태양이 마지막 빛을 모아 노을을 만들고 주변이 어스름해 지면 아이들은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간다. 갑자기 정적이 돌고 먼 하늘에선 소리 없는 폭죽잔치가 벌어진다. 놀이동산의 마지막 피날레가 불꽃놀이인것처럼......
이 정원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은 이쯤 된다. 하지만 큰 행사도 많이 열린다. 가끔씩 잔디위에 꽃 무대가 세워지고 인도네시아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다름 아닌 누군가의 결혼식 채비이다. 각 지방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전통혼례가 가감 없이 연출된다.
이곳만의 아늑함과 아름다움에 도취된 많은 이들이 그들의 특별한 추억을 새기는 곳으로 이곳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르바란이 지나고 한 달 후에 찾아오는 르바란 하지에 이곳은 신성한 곳으로 변한다. 아파트에 사는 재력 있는 주민들이 아파트 직원들을 위해 내어 놓는 소와 염소가 이슬람 의식에 따라 도살되고, 사람들은 고기보다 맛난 삶을 나누어 간다. 아무리 헤아려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면적과 달리 마음속에 남김없이 들어앉은 이 자그마한 공간, 소소한 일상에 행복이 숨어 있듯 작은 것에 담긴 큰 의미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오늘도 이곳, 나만의 뜰인 우리 아파트 정원에선 이토록 많은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열대의 야자나무가 자라듯 아이들도 자라고, 그 열매가 노랗게 익어가듯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연륜도 더욱 익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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