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 논설위원의 ‘인도네시아 현대사’강의 열려
짧은주소
본문
인도네시아 문화연구회(회장 사공경)는 지난 8월 21일과 9월 25일 김문환 한인뉴스 논설위원을 초청, ‘굴곡의 현대사’ 중 제2편인 ‘수까르노와 영부인’과 제3편 ‘수하르또 정권의 영욕과 한국기업진출사’를 주제로 열린강좌를 개최했다.
김문환 논설위원은 ‘수까르노와 영부인’ 강의에서 350여 년간 이어진 식민통치 말미에 국가이념인 빤짜실라를 제안하여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독립을 이루고 인도네시아를 건국하게 된 수까르노는, 이 과정에서 그와 결혼한 11명의 부인들에 의해 그의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1901년 동부자바주 블리따르에서 교사였던 아버지와 발리 출신 어머니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한 수카르노는 이후 수라바야의 민족주의 정치가인 쪼끄로아미노또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딸인 시띠 우따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고 그 후1921년 THB재학 중 잉깃 가르나시와의 재혼, 졸업 후 독립 운동으로 투옥 중 1938년 수마트라에서 메가와띠 수까르노 뿌뜨리 전 대통령 등 2남3녀를 낳아 키운 국모로 불리는 파트
마와띠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여성예찬론자인 수까르노는대통령이 된 후 4번째 부인으로 하르띠니를 맞이하고 1958년 일본-인니 청구권 협상이 타결된 후 일본 방문에서 살리꾸 마이사와 이듬해에는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는 등 거의 1년에 한 명씩 부인을 맞았다. 그의 7번째 부인이며 수까르노의 임종을 지켜본 일본인인 데위(랏나 사리 데위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일본 관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 논설위원은 ‘수하르토 정권의 영욕과 한국기업 진출사’의 강의에서 ‘9.30사태(1965년)’를 한국기업의 인니 진출의 결정적 계기로, 반일감정이 폭발한 ‘말라리 (Malali)사건(1974년)’을 한국기업들의 본격적인 진출이 가속화된 시점으로 설명했다.
김 논설위원은 9.30사태(1965년)에 대해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육군 수뇌부의 납치살해 및 라디오 방송국 장악을 통한 국가의 좌경화 쿠데타가 수하르토 육군소장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압 되자 수카르노 정권하의 친북정책으로 인해 어려웠던 한국 기업의 인니 진출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9.30사태를 계기로 1년 후 한-인니 정식외교관계과 수립(1966년)되고 이어 한국남방개발(코데코), 동화기업(코린도)
등 목재산업을 필두로 한국 기업의 인니 진출이 이어지게 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그는 일본의 인니 경제 잠식으로 인해 반일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1974년 다나카 일본 수상의 인니 방문을 계기로 촉발된 대규모 대학생 시위인 말라리(Malari)사태의 수습을 위해 수하르토 대통령의 지시로 전격 귀국하게 된 베니 무르다니 장군(당시 주한인니대사관 대사)의 인니 입성이 일본 기업들에 의해 진출하지 못한 분야의 한국 기업들이 비로소 진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설명했다.
친한?지한 인사로 알려진 베니 장군은 1983년에 통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등 수하르토 정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한국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 기업들은 80년대 말 섬유?봉제,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진출했고 이어 90년대 LG전자, 삼성전자, 기아자 동차, 현대자동차 그리고 최근에는 포스코 등 자본집약산업에까지 진출하면서, 오늘날 한인사회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인공동체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