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3)
짧은주소
본문
51-53. 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3)
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3)
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dailyindonesia.co.kr)
지난 호에 이어 인도네시아 역사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들을‘인도네시아 역사의 수수께끼(3)’으로 연재한다. 이 글은‘동남아의 역사와 문화’(매리하이두즈 저/ 박장식 . 김동엽 공역)와‘동남아시아 사’(최병욱/미래엔출판사)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유
네덜란드와 영국이 인도네시아 군도와 말레이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이다가 1824년에 동남아시 아에서 영향권역을 구분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영국은 오랜 기간 동인도회사의 식민지였던 수마트 라섬의 벤꿀렌(Benkulen, 현재 벙꿀루)에서 철수하고, 네덜란드는 바따비아 다음으로 중요한 항 구였던 말라까를 영국에 양도함으로써, 인도네시아 군도는 네덜란드 그리고 말레이 반도는 영국의 영향력 하에 놓인다.
영국이 바따비아 대신 개발한 무역항 싱가포르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네덜란드 소유지의 일부를 점령하고, 1811년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던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즈 (Thomas Stamford Raffles)를 자바의 부총독으로 임명한다.
이후 영국이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에 반환하기로 결정한 후, 래플즈는 1819년에 바따비아를 대신할 동남아시아 물산의 중계항으로 말레이 반도끝단에 위치한 작은 포구였던 싱가포르를 선택하고 중국인과 다른 이주자들을 끌어들여서 기지를건설한다. 이후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서 영국 인과 중국인의 경제적 근거지가 된다.
깔리만딴섬에 3개의 국가가 지배권을행사하는 이유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18세기에 깔리만딴섬에 여러 개의 기지를 구축했지만, 회사 상황이 나빠지자 대부분을 방치하게 된다. 이후 1841년에 영국 탐험가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사라왁 지역에 술탄국을 세우고 라자(Raja,왕)가 된다. 브룩 가문은 2차 세계대전까지 이 지역에서 왕국을 유지한다. 한편 별도의 영국 합자회사가 보르네오 북부의 사바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 두 지역은 1963년에 말레이시아에 편입된다. 깔리만딴 서북부에 위치한 또 하나의 독립국가인 브루나이 술탄국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다가 1984년에 독립한다.
선진국에게 동남아시아 식민지의 의미
유럽인들이 16~17세기에 동남아시아에 진출할 때는향신료 구입과 중국산 사치품을 거래하려는 상인들과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선교사들의 의지가 컸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미국 정부는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만들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식민지를 운영한다. 산업국가로 변모한 유럽국가들과 미국은 본국 산업에 공급할 광물과 플랜테이션 작물 등 원자재확보를 위해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고, 식민지에서는 광산과 플랜테이션이 성장한다.
한편 초기에 부임한 유럽의 식민지 관리들은 대개 독신으로 건너와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주변 환경에 적응시켰던 반면, 19세기 이후에는 가족들이 함께 이주해 살면서 열대지역 관습을 거부하고 서구 양식으로 생활한다. 20세기 초에는 서구식 학교가 본국과 똑같은 교과과정으로 설립돼, 식민지 관리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현지인을 교육하게 된다.
자바 커피 재배가 시작된 시기는
동남아시아는 1800년부터 약 150년 간 농경기술이 발전하고 대규모농지 개간이 이루어져서 농작물을 세계시장에 공급하는 생산지로 변모한다. 19세기 초만해도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을 덮고 있던 삼림이 급격하게 감소했고,‘유목’적인 화전민이 정착농업으로 전환하면서 촌락이 새로 형성된다. 또한 환금작물 즉 수확한 농산물을 국제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게 된다. 식민정부는 자바에서 1830년부터 1870년까지 강제 경작제도(Cultivation System)를 실시하고 농민들에게 고무, 사탕수수, 인디고, 커피 및 기타 수출 작물을 재배하게 한다.
노동자를 일컫는‘꿀리’의 유래
18세기에 동남아시아에서 광산과 플랜테이션이활발하게 개발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이주하는데, 이들을 꿀리(kuli)라 불렀다. 지금도 꿀리는 선하역 인부 등 막노동하는 노동자를 일컫는다.
중국인들은 대규모 집단으로 작업했고, 조직과 기술이 상대적으로 우세해, 광산주 또는 농장주들이 선호했다. 반면 현지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기피했고,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는 땅만 있으면 고생스러운 광산이나 플랜테이션 노동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인 노동자 중 일부는 방까와 블리뚱에서 금과주석을 채굴했고, 다른 일부는 리아우 군도의 플랜 테이션에서 후추와 아선약(Gambir)을 재배했다. 광산과 플랜테이션에서의 노동은 꿀리의 20%가 부상이나 풍토병으로 사망할 만큼 고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자가 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대공항으로 꿀리 시대가 막을 내려
중국 정부가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대우에 분개해 꿀리의 송출을 통제했고, 고용 비용 이 상승함에 따라 중국인 꿀리가 감소하게 된다. 이후 인구밀집지역이었던 자바 지역의 빈곤층 여 성들이 플랜테이션의 꿀리가 된다. 수마트라 담배플랜테이션들이 1920년대에 자바 여성을 노동자 로 받았고, 광산 분야에서는 20세기 이후에 기계화가 진행되고 노동강도가 감소하면서 인도네시 아인들이 중국인을 대체하게 된다.
1930년대 대공황 중에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광산과 플랜테이션이 위기에 봉착하고, 수천 명의 꿀리들이 해고를 당하면서 꿀리의 이주시대가 막을 내린다.
방까와 블리뚱에 중국인이 많은 이유
해외 노동력들이 특정 지역에 유입된 후 소수지만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남을 경우 그 지역의 종족 구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주석 광산으로 유명한 수마트라 동부의 방까와 블리뚱 지역의 경우, 1930년 무렵 인구의 40% 이상이 중국인이었다. 꿀리로 온 중국인들이 돌아가지않고 정착해 현지의 종족 구성을 바꾼 것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꿀리의 관문이었던 싱가포르도 중국인이 다수 종족이 됐고, 말레이 반도에 서도 특정 지역은 말레이인이 소수 종족이 됐다.
네덜란드도 중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1920년대 이전까지 금융기관이 없었고, 대신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대부업과 중간무역업자 역할을 했다. 현지 농민들은 덜 익은 농작물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렸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소작농과 농지를 보호하기위해 중국인에게 농지 소유를 금지함으로써, 농민 들은 농산물만 담보로 할 수 있었고 농지는 현지인에게만 팔 수 있었다.
한편 농지 소유권에 대한 제제가 없었던, 베트남과필리핀에서는1930년대 대공항으로 쌀값이 폭락해 농민들이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자 대지주와 인도인 또는 중국인 대부업자에게 토지를 빼앗겼다..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 발리의 뿌뿌단과아쩨의 쁘랑사빌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진출 초기에 자바와 말루꾸 그리고 일부 해안도시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9세기에는 롬복, 발리, 아쩨 등과 잇따라 전쟁을 벌이고, 다른 지역은 지배자들을 설득해 식민지에 편입하도록 만듦으로써 인도네시아 지도를 완성해 간다.
발리와 롬복 주민들은 네덜란드 군대가 공격해오자 뿌뿌딴(Puputan :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으로 저항했다. 현지 왕실구성원들과 가족들이 적들의 총구 앞에 서서 싸우다가 죽으면 다음 줄에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싸우다 죽고 이를 다시 반복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저항했다.
아쩨는 수마트라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네덜란드의 공격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다. 네덜란드 군대가 1870년에 아쩨에 대한 공격을 시작해1874년에 비교적 손쉽게 수도와 왕궁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슬람학자들이 침입자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시작하고, 적의 손에 죽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하면서 지하드(Jihad. 성전)또는 쁘랑사빌(perang sabil. 인도네시아어로 성전)을 촉구했다.
네덜란드 군대는 1913년에 아쩨를 평정했으나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계속됐다. 아쩨 전쟁은 역사적으로 가장 긴 식민지 전쟁이었고, 가장 비참한 전쟁 중 하나다.
네덜란드가 아쩨를 공격한 이유
아쩨는 수마트라 북단 위치한 이슬람 왕국으로 해적의은신처로 사용됐고, 해적들은 동부수마트라 플랜테이션 지역의 안전을 위협했다. 또한 아쩨에는 풍부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고, 다른세력들도 아쩨에 관심을 가진다는 소문이 돌자 네덜란드 입장에서 지배권을 확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말레이어가 인도네시아 공용어가 된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말라까와 스리위자야 시대부터 공통어로 사용되던 말레이어를 식민 행정과 도시 및 시장에서 공용어로 사용했다. 인도네시아는 자바섬을 중심으로 독립한 후에도 말 레이어를 공용어로 채택한다.
당시 대다수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말레이어를 사용했고, 소수의 서구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네덜 란드어를 구사했다. 19세기 말부터 말레이어로쓰인 대중문학과 인쇄물이 근대화, 민족주의 및해방의 개념을 전했다.
1905년에는 식민정부가‘정치적으로 바람직한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좋은 읽을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말레이어와 지역어로 출판물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후일 국영 출판사 발라이 뿌스따까 (Balai Pustaka)를 설립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사원에 첨탑과 돔 설치된 시기는불과 100년 전
인도네시아 이슬람사원에 중동지역 건축 양식과첨탑이 도입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인도네시아인 들이 직접 중동을 여행하게 되면서이다. 증기선으로 여행을 하는 등 교통이 발달하자,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중동지역으로 성지순례를가게 됐고, 현지에 머물면서 이슬람 사상을 연구하고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하거나 이슬람기구에참여해 이슬람뿐만 아니라 정치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됐다.
20세기 이전의 이슬람사원은 이슬람 도래 이전의 건축에 사용되었던 양식, 즉 힌두-불교 양식으로 건축됐다. 자바와 발리의 사원은 여러 층으로 겹쳐있는 지붕과 분리된 출입구 등의 구조를가지며, 이는 힌두-불교 신화에 나타나는 메루산을 표현한 것이지만 19세기까지는 이슬람 건축에도 적용됐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