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행복에세이]아!바람이여<서미숙>
짧은주소
본문
행복 에세이 아! 바람이여!
서 미 숙 / 수필가
오늘도 어김없이 바람이 분다. 바람은 백가지 이름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이름 을 지녔다. 불어오는 시
기와 방향에 따라, 그 성질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이 붙는다. 꽃샘바람, 하늬바람, 산들바람 같은 순한 이름을 지니기
도 하고 고추바람, 황소바람, 칼바람 같은 매서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우리나라에 주기적으로 한 번씩 찾아오는 강력한 회오리바람인 태풍은 그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어쩌면 바람은 변덕
스런 심술쟁이와도 같다.
부드러운 입술처럼 꽃잎을 스치다가도 광포한 발길질로 뿌리째 흔들기도 하고, 억새풀 사이를 휘저으며 쉬익쉬익 지휘
를 해 보이다가도 늙은 느티나무 가지 하나를 우두둑 분질러 놓고 달아나기도 한다.
바람은 천개의 손을 가졌다. 스치고 간질이고 어루만지며, 할퀴고 부수고 무너뜨린다. 나뭇가지를 흔들어 새 움을 틔우
고 입 다문 꽃봉오리를 벙그러 놓는다.
여인의 실크 스카프를 훔치고 노인의 낡은 중절모를 벗기기도 한다. 그러고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 바람이 없다면 아
마도 바다는 밤새 뒤척이지도 않고 들판도 들썩이지 않을 것이다. 늦가을, 늪지의 수런거리는 표표한 깃발의 춤사위도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물결치는 보리밭 이랑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달리는 자만이 거느릴 수 있는
바람의 푸른 갈기를 본다.
바람이 부리는 서술어는 하도 많아서 헤아리지 못한다. 바람 불다. 바람 들다. 바람이 일다. 뿐 아니라, 바람나다, 바람 맞
다, 바람피우다 처럼 사람과관련된 표현들도 많다. 바람이 대자연의 기류 현상 만이 아닌, 사람 사이의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일을 바람에 비유한‘예’로는 하는 일이 흥겨워 절로 신이 나는 신바람이 있고, 짝을지어 돌아야 신명이 나는 춤바
람이 있다. 한국여인들의 특허인 치맛바람처럼 교육열이 한쪽으로쏠려 부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뒤늦은 나이에 노력과
열정을 다해 자기의 꿈을 실천하는 늦바람, 도시복판을 관통해가는 첨단 유행의 패션바람도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오는
선거철에는 병풍이니 북풍이니 황색바람이니 하는 많은 유행어를갖다 붙인다.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바람과 함사라지다’는 비단 영화 속의 제목 일뿐, 바람은늘 흔적을 남기는 것 같다. 바
람이 지나간 나뭇가지에 수액이 돌고 움이 터온다.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달린다. 잔잔한 물을 흔들고 저녁연기를 흩트
리고 버드나무의 무성한 이파리를 송두리째 흔든다. 정지된 물상을 부추기고 흔듦으로써 자기의실재를 입증 하는 것, 어
쩌면 그것이 바람의 존재 양식인 모양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밤, 밤새 윙윙 소리가 나고 베란다 창문이 들썩 거렸다.
무섭고 불안하여 잠을 설쳤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나는 아무 일없이 달려오는 찬란한 아침햇살을 보았다. 세상은 평화
로웠고 밤새 불던 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바람이란 지나가는 것이로구나.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것, 그것이 바람의 본질인지 모른다. 그럼으로 바람 앞에 흔들거리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
람들은 그저 기다릴 일이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 모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그렇게 서성이다가 바닐라 향처럼 사라져갈 가벼움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바람이 아니다.
사랑이고, 또 운명인 것이다.
바람은 자유혼이다. 갈 곳도 메일 곳도 거칠 것도없다. 여인의 옷깃을 스치고 히말라야 고봉 14좌 를 스치고 카시오페아
의 성좌를 스친다. 에돌아 휘돌며 구석구석을 헤매다 식은 가슴 한 귀퉁이에 가만가만 꽈리를 틀기도 한다. 세상의 어떤
울타리도, 도덕률도 그 고삐를 휘어잡지 못 한다. 요정이었다가 마왕 이었다가 제 성질을 못이기는 미치광이였다가 술
취한 노숙자처럼 한 귀퉁이에서 잠들어 버린다.
바람은 불사신이다. 죽은 듯 종적 없이 잦아들었다가도 하나의 나뭇잎을 흔들면서 조심스럽게 다시 환생한다. 누구도 바
람, 그를 본 자는 없으나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아도 바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마음이 한없이 떠 돌때 혹시 내 전생에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소멸되지 못한 바람의 혼이 우
리 몸 안, 어딘가에 퇴화의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느낀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머지 삶을 휘몰
아갈 강력한 바람의 존재를 꿈꾼다. 기압골의 변화에 따른 대기의 움직임만큼이나 사람들 사이에 출몰하는 바람의 정체
성에 대하여, 그리고 또 은밀하고도 집요한 에너지로 끊임없이 우리의 내면의삶을 서성이게 하는 그 소용돌이에 대하여
바람에 비유해 보며 차분하게 눈 맞추고 싶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바람처럼 안개처럼 그렇게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예기치 못한 삶의 복병들은
바람처럼 어느 길모퉁이에서 만날지 모른다. 그 막연함과 두려움 속에절박한 의미를 지니고 다가왔던 바람, 그러나 이
제 평온한 마음으로 천천히 마개를 열고 내안의 바람을 세상 밖으로 날려 보내면 어떨까. 돌고 돌다 어느 들판에 흔적 없
이 잠들어 버려도 좋고, 봄꽃 향기 환하게 머금고 내게로 다시 돌아와 주어도 좋다. 아니면 이내 느닷없는 돌개바람에 휩
쓸리지 않게 팽팽한 부레 같은 내 마음 어딘가에육중한 연자 맷돌 하나 달아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