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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특별기고> 대한민국과 류큐왕국

8,539 2012.09.0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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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별 기 고

대한민국과 류큐(瑠球)왕국

대한민국은 윤봉길이 있었고 류큐는 윤봉길이 없었다

박 대 우

독도 영유권 문제와 센가쿠(尖閣)열도분쟁을 다루는 일본의 두 얼굴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였고 이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

가 자국의 영토를 방문한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일본정부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독도 영유권 문

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한국이 거부할경우 조정절차를 밟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

다. 대통령의 이번 독도 방문이 애국적 동기에서비롯된 것은 틀림없지만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

로 여기고 1952년 한국전쟁의 어려운 와중에서도이승만라인을 선포했던 대일 강경주의자 이승만

(1875~1965) 대통령도 하지 못한 일을 왜 임기말인 이 시점을 택하여 특별한 실리도 없는 일회성

깜짝 퍼포먼스를 행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홍콩의 시민운동가들이 선편으로일본과 중국이 영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동중국

해의 센가쿠(尖閣) 열도 (5개 무인도와 3개 암초로 구성됨-중국명 다오위다오(釣魚島))에 상륙을

감행하였고 일본은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파견하여이들을 즉각 체포하여 강제 송환시켰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해 취한 강경자세에 비하면 홍콩 시위대는 벽돌을 던지고 일본 경찰의 공무

집행에 저항했지만 단순한 불법입국 혐의만 적용하여 조용히 넘어가는 것도 다소 의아스럽습니다.

 

저의 아마추어적 시각으로는 제 주머니 안에 들어온 물건은 남에게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챙기고

남이 가진 탐나는 물건은 시끄럽게 떠들고 주변의이목을 끌게 하여 다툼거리로 만든 다음, 자신들

의 국력과 국제적인 외교역량을 동원하여 빼앗으려는 야비한 수작이며 이것이 같은 무인도 영유권

문제지만 독도와 센가쿠열도를 다르게 다루는 일본의 외교책략이 아닌가 봅니다.

 

재일교포 2세인 일본 동경대 강상중(1950년생)교수 같은 이는“이대통령의 독도방문은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마땅한수단도 갖고 있지 못한 일본이 국제사회에 독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전략적실수이며 특히 이대통령이 일왕에 대해 사과를 요

구한 발언이 일본 특유의 건국신화 구조 속에 갇혀 있는 천황제도와 국수적이고 경직된 우익 문화

를 건드림으로서 동북아 한중일 3국의 민족주의라는‘판도라의 상자’만 연 꼴이 되었다”라고

평했습니다.

 

역사를 보는 다양한 눈 - 영웅사관이냐 ? 민중사관이냐 ?

 

최근에 불거진 중국-일본 간 센가쿠(尖閣)열도영토분쟁을 보면서 지난해 경희대 강효백 교수

가 발표한“일본-중국 흥망의 키”라는 논문 중‘한국과 류큐(瑠球)의 운명, 윤봉길이 갈랐다’

라는 글이 떠올랐습니다.“한국은 독립을 했는데류큐(瑠球)왕국은 왜 일본의 일부인 오키나와(沖

繩)현이 되어버렸는가?”하는 것을 역사적 배경과 2차 세계대전 후 전개된 국제정치 질서의 시각

에서 분석한 흥미로운 글이었으며 우리나라가 2차 대전 후‘대한민국’으로 건국하게 된 것은 윤

봉길(1908~1932)이라는 영웅적인 독립투사가있었기 때문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다시 한 번 나

라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유,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에 머리가 숙여지

는 숙연함을 느끼게 됩니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독일의 역사가 랑케(1795~1886)는“자신을 숨기고 사실로 하여

금 말하게 하라. 역사가의 사명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일이다”라고 역사학의

실증주의를 강조했지만‘서구의 몰락’을 쓴슈펭글러(1880~1936)는 역사를 문화형태론

으로 보아 문명은 발생, 성장, 노쇠, 사멸의 생명체와 같은 과정을 밟으며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19세기 역사 철학자 헤겔(1770~1831)은“세계사는 자유정신의 발전

과정”이라는 관념론으로 역사를 설명했지만칼·막스(1818~1883)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

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며 노동의 잉여가치를둘러싸고 필연적인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인간의

물질적 욕구가 사회발전의 유일한 동력이라는 유물사관을 주장했습니다.

 

20세기 들어 발전사관을 비판하고“역사 그 자체는 시간의 흐름일 뿐,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 나타나면서 미국 투자가 조지·소로스가 존경의 표시로 자신이 설립한 재단의 이름

을“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그의 저서’에서따왔다는 철학자 칼·포퍼(1902~1994)는 한 걸

음 더 나아가“역사는 의미가 없으며 발전하지도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가장 걸출

한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1892~1982)는“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주장하고 결국 역사란 기록의 산물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는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당시대의 시

대상을 보는 눈으로 항상 새롭게 역사를 해석하고기록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는 영웅이 만들어 가느냐?, 민중이 만들어가느냐?’라는 논제를 놓고 영웅사관과 민중사관

모두를 거부하고‘역사란 극소수의 영웅과 그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 함께 만들어 간다’고 주장하

지만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했던 1943년 11월카이로회담과 그 후 한국과 류큐왕국의 엇갈린 운

명을 되돌아보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수는 없지만 어느 시점에서 역사의물줄기를 바꿔 놓

는 것은 영웅이 촉발시킨 한 줌의 불쏘시개가 민족 전체의 명운을 갈랐는다는 사실 또한 지나간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와 류큐(瑠球)왕국- 동병상련의 슬픈 운명

 

일본의 오키나와현(沖繩縣)은 일본과 대만 해역의 중간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60여 개의 섬으

로 이루어진 아열대 해양군도이며 현재 일본과중국간에 영토분쟁이 되고 있는 센가쿠(尖閣)열

도- 중국명 다오위다오(釣魚島)는 이 군도의 남쪽 끝에 놓여 있습니다. 오키나와의 면적은 제주도

의 1.2배이며 인구는 140여만 명, 현청은 나하(那覇)시에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19세기까지만 하

더라도 류큐(琉球)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한국의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호혜실리의 조

공관계에 있던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었습니다.

 

류큐왕국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조선조 중기명문가 출신의 이단아였던 허균(1569~1618년)

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 홍길동이마지막에 오키나와로 추정되는 율도국을 동경하

고 그곳으로 떠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당시 오키나와는 요즘으로 치면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은

번영을 누린 동남아 해상루트상의 무역허브였습니다.‘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선조 때 동인의

영수이며 청백리였던 허엽(1517~1580)의 3째아들이자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동

생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한국인 최초로천주교 신자가 된 혁명가였으며 광해군 때 반역죄

로 참형을 당한 비극적 인물입니다.

 

류큐왕국은 16세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스페인등이 아시아 항로개척에 나섬으로서 유럽에 알려

지게 되었으며 1797년에는 영국군함이 정박하였고 1853년에는 미국의 페리(1794~1858) 제독

이 이끄는 해군 함대가 나하(那覇)시에 상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68년 명치유신으로 근대

식해군력을 갖춘 일본이 1879년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지휘 아래 무력으로

류큐왕국을 점령하고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하여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류큐왕국의 쇼타이 국

왕을 동경으로 압송하여 후작에 봉함으로서 1429년 쇼하지 왕이 개국한 후 450여년을 이어온 왕국

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몇 차례 외침과 민란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고당파싸움과 세도정치로 속병이 깊었던 조선왕조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고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 원세개(1859~1916)의 북양해군을 궤멸시킴으로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나라

를 조선에서 몰아냈으며 1904년 러일전쟁에서 마저 승리한 후에는 사실상 조선을 독점하게 됩니다.

1905년 7월에는 일본수상 가즈라(桂太郞)와 미국의 육군장관 테프트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그 해 11월에는 을사보호조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

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후 1910년 한일합방을 완성함으로서 한국은 36년의 일제강점기에 들어가

게 됩니다. 청나라의 세력권 아래 함께 속해 있던류큐왕국과 조선왕국이 1879년과 1910년에 각각

일본 제국주의에 편입되었으니 두 왕조의 운명은참으로 유사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말 시인이자 우국지사였던 황현(1855~1910)은 망국의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절명시 4편을 남

기고 음독, 순국했는데 그가 쓴‘매천야록’에 조선을 망하게 만든 3대 패악으로‘관서기생, 전라

아전, 호서양반’을 들었습니다. 평안도기생이 나라의 풍속과 윤리를 음란하게 만들어 젊은 선비들

을 병들게 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지방 아전들이어찌나 권세가 세었던지 양반들을 잡아 다가 볼기

를 치고 토색질을 일삼았으며 충청도양반은 나라의 앞날은 뒷전이고 그저 음풍농월과 일가권속 챙

기는데만 열중했다는 이조 말의 병들고 무능한 지도자들의 행태와 부패하고 피폐해 진 사회상을 적

나라하게 고발한 기록입니다.

 

조국독립을 위해 산화한 청년 혁명가 윤봉길(1908~1932)

 

매헌 윤봉길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19세까지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30년 3월“丈

夫出家 生不還(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글을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올라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갑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 형가(? ~BC227)가

훗날 진시황이 된 진왕 정(政)을 죽이기 위해 역수를 건너며 노래했다는“風蕭蕭兮易水寒 士一去

兮不復還(풍소소혜역수한 사일거혜불부환-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대장부 한 번 떠나

면 돌아오지 않으리)”와 유사한 맹서입니다.

 

1931년 윤봉길은 임시정부 지도자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될 기회를 맞습니다.‘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행사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신문기사를보고 백범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거사일 아침 모든 준비를 끝내고 백범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 윤봉길은 마지막 결의를 다지기 위

해 백범이 전하는 금강경의 말씀“懸崖撤手 丈夫兒(현애철수 장부아-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것

이 참 대장부다)”를 듣고“이제 제 시계는 한 시간 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 선생님의 낡은 시계와

바꾸시지요”라며 시계를 교환하고 나서 목이 메어“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는 백범의 마지

막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도시락폭탄을 몸에 품고홍구공원을 향해 떠났습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은 준비해 간 폭탄을연단을 향해 투척했고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됩니다. 단상에있던 시라카와(白川) 대장, 가와바다(河端) 일본

거류민 단장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노무라(野村)중장은 실명, 우에다(植田)중장은 다리가 잘렸으

며, 시게미츠(重光)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村井)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

기장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

고 일본 대판형무소로 옮겨져 수감되었다가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으로 24세라는 젊은 나이

에 순국함으로서 짧지만 영웅적인 혁명가의 생을 마쳤습니다.

 

윤봉길의 의거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중국의 장개석(1887~1975) 총통은“중국의 백

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고감격했으며 이제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할 일없는

망명객들이 모여 싸움이나 일삼는 파락호 집단쯤으로 여기고 냉대하던 종전의 태도를 180도로 바

꾸어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게 됩니다.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

반을 설치하여 한국독립군 양성을 돕기 시작했으며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상해임시정부는 다시 독

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한국과 류큐의 명운을 가른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스벨트(1882~1945),

영국의 처칠(1874~1965), 중화민국의 장개석(1887~1975) 등 연합국의 3수뇌가 이집트 수

도 카이로에서 전후 질서를 구상하는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회담에서 3국 정상은 일본의 영토를

1914년 1차 대전 이전으로 되돌리고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며 한국의 독립 문제를 처음으

로 합의하는‘카이로 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카이로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동남아와 태평

양의 여러 지역들과 한국을 비롯한 만주, 대만 등식민지는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나 류큐왕

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잊혀진 왕국이 되었습니다. 사실 카이로회담은 류큐왕국이 독립을 회복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류큐인들은 류큐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부

끄러우리 만큼 일본에 완전히 순치되었고 류큐인들의 독립의지와 실천노력이 너무나 미약하고 미

미했습니다.

 

카이로에서 미-중 양국 간의 첫 정상회담은 11월 23일 오후 7시경에 시작되었습니다. 장개석은

왕총혜 국방위원회 비서장을 대동하고 루스벨트의 숙소로 건너갔으며 두 정상은 주로 일본이 점

령한 지역의 전후처리문제를 숙의하게 됩니다. 시침이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루스벨트의 입에서

졸음을 확 깨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류큐는 일본에 의해 불법 강점당한 활모양의 호형(弧形) 군

도입니다. 마땅히 탈환되어야 합니다. 류큐는 중국과 지리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각하가 원한다면 류큐군도 전부를 중국에 넘겨주겠습니다.”루스벨트의 통 큰 제안에 대해 장개석

은“류큐는 우선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공동관리한 후, 국제신탁통치에 위탁하여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의외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틀 후 11월 25일 재개된 미-중 양자회담에서루스벨트가 류큐를 다시 거론하였습니다.“류큐

의 미래에 대해 숙고해 보았습니다. 타이완에서 규슈(九州)까지 서태평양을 둘로 가르는 류큐는 중

국의 안보방파제입니다. 그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중국이 타이완만 탈환하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타이완은 물론 중국본토의 안보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처럼 중요한 류큐를

침략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의 손아귀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본인은 아무래도 류큐를 타이완

과 펑후(澎湖)제도(대만해협에 있는 여러 섬)와함께 귀국이 관할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그러

나 장개석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의 침묵이 답답했던지 루스벨트는 다시 간단명료한 어조로“각하가 원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류큐를 중국에 주겠습니다.”그러나 장개석은 “류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류

큐는 중미 양국이 공동 신탁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는 불가사의한 우답을 하여 루스벨트는

두 번 다시 류큐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후일 중국공산당지도자들은 장개석이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친일적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일본을 배려한 매국적 행위를 했다고 비판하게 됩니다.

 

장개석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상해의거를 결코 잊지 않았다

 

왜 장개석은 류큐의 독립이나 중국 영토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의 독립만을 주장했을까요? 실

제 카이로회담에서 처칠은 한국에 대해 미-영-중 3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했으나 장개석이 이

를 일축하고 대신 한국 독립의 약속을 선언에 넣어 발표하자는 기습적인 제안을 관철시켰습니다.

누구 때문이었겠습니까?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딱 한 사람만, 딱 한 사건만 들라면, 역사는 명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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