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호 - 행복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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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보고르 방향으로 가다보면 찌아위 톨을 지나 뿐짝으로 올라가는 길과 찌아위, 수까부미쪽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 온다. 주말이면 자카르타 인근에서 가장 시원하다는 뿐짝으로 향하는 차량이 꼬리를 무는데 그 북새통을 비집고‘따후고렝(두부튀김)과 ‘끄루뿍 (chips)’을 파는 상인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바로 그 길목에서 왼쪽으로 틀어서 10여분을 올라가면 전통시장 사거리가 나온다. 그리고 따만 사파리 쪽 에서 내려오는 차량행렬과 그야말로 시골에서 5일장 같은 따스함이 묻어나는 과일 가게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면 란짜마야 골프장 콤플렉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곳에서 바라보는 멋진 전경의 중심에는 2,211m의 우뚝 솟은 산이 하나 있다. 이 산이 바로 구눙 살락(Gunung Salak)이다.
몇 년 전 러시아 전투 수호기가 시범 비행을 하다가 안개에 휩싸인 이 산에 달려들어 안타깝게도 40여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적이 있다. 그 위엄과 자태를 한껏 숨기고 안개 뒤에 숨어 있다가 이른 새벽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의 화창한 날씨를 끌고 나와 엄청난 위용을 잠깐씩 내보이는 산, 보는 이들의 마음을 한껏 요동치게 하고서 다시 조용히 안개 뒤로 숨어 버리는 바로 그 멋 진 산이 구눙 살락(Gunung Salak)이다. 오늘은 그 산자락에서 내 마음속에 항상 우뚝 솟아 있는 가장 큰 산인 나의 아버지와, 언제나 내가 듬직하고 고요한 산자락이 되어주어야 할 나의 큰아들 보니, 그리고 아버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며느리인 나의 아내 ‘산드라’까지 우리 가족 넷이서 오붓하게 골프 라운딩을 즐기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올해로 88세이다. 젊어서는 그 유명한 미국 배우 그레고리펙이 울고 가셨을 듯한 멋진 외모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던 아버지께서는 한국에서 정치를 하셨다. 어릴 때 기억에는 집에서 자주 잔치가 열렸고 화려한 꽃 모양으로 장식한 마른 오징어 포와 풍성한 홍어 삭힌 냄새가 가득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현모양처라 불리던 어머니는 항상 큰 일 하시는 아버지 뒷바라지 하시느라 점점 골병이 들었다. 정치범으로 교도소에 가신 아버지 영치금 넣으랴 자 식들 셋을 지키시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내가 국민 학교 3학년 때 아프시다는 기색도 없이“잠깐 낮잠을 자야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아무런 복선도 남기지 않은 채로 허무하게 내 앞에서 눈을 감으셨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형과 누나의 교실에 찾아가 어머니의 임종을 알렸다. 그랬던 내 가 지금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많이 기억해내지 못 하는 것이 서글프기만 하다. 어머니를 빨리 떠나 보내야 했던 그 모든 원인이 아버지라는 원망 자 체도 너무 어린 나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인생의 전부는 아빠, 내 아버지였다.
나는 엄마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친구도 없었고 할 일 은 공부밖엔 없었다. 전과목 100점을 맞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 잘생긴 얼굴에도 웃음기 하나 없었던 아버지에게 간간히 웃음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올백의 성적표와 일주일 건너 받아오는 각종 경시 대회 상장들이라고 나는 믿었 다. 교도소에서 출소하신 아버지는 엄마와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한참을 괴로워하셨다. 그리고 남은 자식들을 위해 새 삶을 사시려는 아버지는 정말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치셨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운동장에 브리사 승용차 한 대가 멈추고 멋진 아버지께서 차에서 내리시면 여선생님들이 호들갑을 떨었고, 학교가 술렁이기까지 했다. 그 멋진 아버지는 나의 자랑이었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인 나는 아버지의 자랑이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청렴결백 하셨다. 당신 가족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위해 사셨다. 교도소에서 나와 자식들 때문에 정치를 포기하시고, 전문경영인으로 방향을 바꾸셨지만 깨끗한 성품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시고 희생하시는 삶을 사셨다. 그렇게 경제적으로는 무엇 하나 챙기지 못하셨던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커녕 나는 대학 시절부터 돈을 벌어서 도덕 경영을 실천하시다 쫄딱 망한 아버지와 형제들을 건사해야만 했다.
나는 삼성에 입사해서도 가족들 뒷바라지로 카드 빚만 늘어갔다. 계속해서 그리 살 수는 없을 것 같아 회사 인사처에 찾아가 설득한 끝에 나이 27 세에 인도네시아로 해외 주재를 나왔다. 해외에서 3년간 죽어라 열심히 벌어 1억 원을 만들었는데 한국에서 내 통장을 관리하시던 아버지가 또다시 시작한 사업에 내가 모은 돈을 몽땅 털어 넣어 내 통장에 고작 2백만 원 남짓 남았다는 걸 알았던 날 밤, 나는 내 운명을 울부짖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잔인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당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첫째는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잘 부양해야 한다는 것. 그걸 잘못하면 평생을 소중한 줄 모르고 살 뻔 했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갈 수도 있다는 것과 또한 그 아픔으로 자식들은 평생 마음속에 가족에 대한 허전함을 느끼고 다른 평범한 가족들의 삶을 동경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세상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 늙어서까지 다른 사람에게 해 끼치지 않고 도와주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 내가 좀 덜 먹고 덜 챙기더라도 친척들과 주변 지인과 동료들에게 베풀면 나이 들어 돈이 없더라도 마음은 편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베풀더라도 늙기 전에 돈을 좀 모아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잘하면 마 음은 풍요로울지 몰라도 이유를 막론하고 나이 들어서 가진 게 없으면 자식들에게도 큰소리 못 치고 삶이 구차해지고 초라해진다는 것,
넷째,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멋지고 깔끔하게 살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론 풍족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평온해야 자식들이 잘되고 온화한 미소와 어우러질 때 나이가 있어도 존중받고 대우받고 산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여유로웠던 시절에 30세도 안되어 골프를 치셨고, 아직도 골프를 치신다. 원래 우리나라 연식 정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전매청에 들어가셨고, 외모와 운동 신경이 뛰어나 전매청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신 후에 노조 위원장을 거쳐 정치에 입문하셨단다. 그러니 지금 88세에 골프 라운딩이 가능하신 것은 물론이고 자고라위 캐디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자이다. 아버지와 라운딩을 할 때마다 나는 하늘과 알라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병원신세를 지는 저 연세에도 아직 골프를 치시니 말이다.
한국의 겨울은 나이 든 어르신들이 지내기에 무척 힘든 계절이다. 빙판길은 낙상의 위험도 크고 일단 날씨가 추우면 기관지부터 시작해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다. 그래서 겨울엔 막내아들이 살고 있는 따뜻한 인도네시아로 오신다. 아직 골프를 즐기실 정도로 건강하시니 이 정도 해외여행이야 거뜬하시단다. 게다가 천사같은 인도네시아 며느리가 아버지를 너무나도 잘 모신다. 아버지 몸이 조금이라도 수척해지시면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적시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인도네시아 며느리다. 그런 며느리에게 아버지는 싱글골퍼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한국 사람보다 피부가 검어 햇빛에 나가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아버지 건강을 위해 골프를 시작했다. 아내 역시 골프 스윙 폼이 아버지 작품대로 아주 멋지다. 아버지와 말동무를 하고 직접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풀어놓는 며느리와의 동반 라운딩이 아버지에겐 무엇보다도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큰아들 보니가 방학이라 자카르타에 와서 오늘 라운딩에 합류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자카르타에 오시면 TV를 보다 모르는 단어나 한자를 할아버지에게 물어가며 한글을 깨우치던 큰아들 보니는 자신의 한국어 실력의 비결이 할아버지의 자상함과 즐겨보는 프로그램 ‘무한도전’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나의 국제결혼으로 걱정됐던 아이들 언어문제는 결혼 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을 한 군데 더 다녔던 아내의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우리 아이들 은 4살부터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기에 부모가 모두 한국 사람인 자녀들보다 한글 실력이 훌륭하다.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의 우성인자 결합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엄마 말로는 “아버지 피만 물려받았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리더십도 뛰어나 미국국제학교인 지스(JIS) 총학생회장을 거쳐 지금은 미국 명문대를 다니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큰아들에게 거대한 위용을 감추고 묵묵히 안개 뒤에 숨어 있는 산, 구눙 살락 (Gunung Salak)처럼, 나도 묵묵히 아들을 지켜 주는 산이 되고싶다. 골프로 집중하실 때는 유 전인 수전증도 불사하고 떨리지 않고 멋진 티샷을 날리는 내 삶의 큰 산이 되어주신 나의 아버지처럼 나도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과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속 위안이 되어주는 든든 한 큰 산이 되고 싶다. 언제나 쉬어가며 아무때나 오를 수 있는 내 마음속의 산, 구눙 살락(Gunung Salak)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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