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0 꼭 이루고 싶었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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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중석광산이 유명했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에서 자랐다.
교과서에 나올 만큼 한 때 제 2의 명동으로 불리며 1980년대 외화벌이의 선봉장이었던 그곳은 값싼 중국산 중석에 밀려 대한중석이 폐광되고 난 후 너무도 보잘 것 없는 폐광촌으로 전락했다.
4만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시가지는 옛 영광을 뒤로하고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상동읍을 다른 폐광지역보다 더 불쌍하고 못사는 동네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여름방학이면 도시에서 의료봉사를 비롯한 많은 봉사자들이 우리 동네를 찾았다. 도시에서 멋지고 예쁜 대학생형, 누나들과 좋은 차를 타고 온 의사선생님들이 맛있는 것을 나눠주고 함께 음악교실, 미술교실, 과학교실 등 재밌는 학습을 하며 보내는 3~4일의 시간 이 너무 행복했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을 배웅하는 우리의 눈에는 아쉬움의 눈물이 고였다. 그 후 나 와 친구들의 장래희망은 축구선수가 아닌 대학생, 의사, 그리고 간호사가 되었다. 나도 저분들처럼 멋진 어른이 되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느낀 감정을 전해주고 꿈을 갖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이곳 인도네시아 땅에서 내 다짐의 첫걸음을 떼게 해주고 보람을 느끼게 해준 파푸아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해외봉사활동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외국까지 가서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푸아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내가 지금 인도네시아에 있기 때 문이었다. 파푸아는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5시간 가야하는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Dari Sabang sampai Merauke라는 말이 있다.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라는 말 인데 그 거리가 한국에서 자카르타에 오는 거리와 맞먹는 5100KM에 달한다. 우리가 간 곳이 바로 동쪽 끝 머라우케의 울릴린 지역이었다.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7시간, 차로 5시간 비포장도로를 달려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토색 길, 그리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확 트인 시야가 장관을 이뤘다. 머라우케의 명물인 2M 이상 치솟은 개미굴이 곳곳에 보이고 손에 잡힐 것 같이 가깝게 느껴지는 환상적인 석양이 파푸아에온 우리를 환영하듯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우리는 격한 환영을 받으며 쉽게 갈수 없다는 파푸아 머라우케에 발을 들여 놓았다.
파푸아에 사는 부족들의 생김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네시아 다른 부족들과 많이 다르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연상케 하는 흑색피부와 곱슬머리는 인도네시아 곳곳을 다녀본 내게도 생소했다. 대체적으로 얼굴이 작고, 코는 높고 뾰족하며 다리가 굉장히 길었다. 그리고 토속신앙 때문에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치아를 까맣게 물들였다.
성격은 꽤나 전투적이다. 실제로 처음 이곳을 개발할 당시 많은 부족들이 전사복장을 하고 칼과 활을 차고 나와 활을 쏘아대며 외부인의 출입을 격렬하게 막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 곳 남자들은 전투본능이 강해서 자신의 가족들이 남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전사복장을 갖추고 상대방을 찾아가 전투를 신청하고 칼부림도 서슴지 않는 다고 한다. 팜나무 농장을 운영하는 한국의 한 현지법인이 세운 초등학교에서 미술수업 통역을 맡아 3학년 교실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장난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서로 밀치며 물어뜯고 있었다. 조금의 위화감을 느끼며 들어선 교실의 분위기는 담임선생님의 한마디에 좀 전과 달리 매우 정숙해졌다.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낯선 외지인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신기함과 기대감, 부끄러움 등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듯 했다. 나 또한 저랬었겠지?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며 준비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나눠줬다. 그리고 꽃과 나무 등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나눠준 물품을 사용하지 않고 각자의 가방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내더니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봤더니 새로 생긴 물품들이 아까워서 쓰지 못 하겠단다. 크레파스를 처음 써보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크레파스로 몇 번 선을 그어보더니 아까워서 그런 건지 너무 굵어서 어색한 건지 자꾸 익숙한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내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3학년이지만 수염을 기르고 어른의 모습을 한친 구들도 몇몇 보였다. 학교가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 입학할 때 학교를 다녀보지 않은 아이들을 1학년부터 가르쳤기 때문에 3학년인데 또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곳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너무 없어서 좋아하는 것을 그리라고 하면 30명이 넘는 친구들 모두 나무, 꽃, 집이 고작이다. 장래희망도 남자는 군인, 여자는 선생님이다. 다른 학년도 마찬가지다.
고학년들은 물감과 팔레트를 처음 봐서 도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저학년들은 풍선하나에 마냥 즐거워한다. 아이들이 하 나씩 알아가면서 느끼는 뿌듯함을 나도 느끼고,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까지 즐거워진다. 다만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졸업 후 진학할 중학교가 없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 학교는 제법 거리가 먼 곳에서 통학하는 학생 들이 많아 오전 11시에 끝났다. 그 후 의료봉사를 진행 했는데 내가 맡은 부분은 학교 옆에서 운영 중인 클리닉의 의사선생님과 함께 주민들의 혈액 형, 알레르기, 흡연여부, 음주여부, 현재 아픈 곳을 확인해서 진료기록 카드를 작성하고 의사선생님의 처방에 따라 구비된 약을 나눠 주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혈액형을 모르고, 계란, 생선, 면 종류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곳은 물이 귀해서 자주 씻지 못하고 옷을 빨지 못해서 피부병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많다. 클리닉에서 혈액형 검사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에이즈나 말라리아 문제 때문이고, 주민들이 피부병으로 클리닉을 찾으면 의사선생님이 계란, 생선, 면 종류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해서 피부병을 알레르기로 착각하고 있었다. 몇 시간정도 밖에 있던 나도 손등으로 얼굴에 난 땀을 훔쳤더니 서걱거리는 느낌과 함께 황토색 먼지가 눈에 보일만큼 많이 묻어 나 오는데 마스크도 없이 하루 종일 황톳길을 뛰어다니며 자동차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아이들의 건강이 걱정됐다. 가끔 14~15세의 꼬마 엄마들이 아이를 안고 찾아올 때면 비슷한 또래의 친척 동생들이 생각나며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온몸에 금붙이를 주렁주렁하고 찾아온 회사 간부급 인사의 아내를 보며 놀라기도 했다. 3일간 800명이 넘는 주민의 건강 상담을 하고 200여명의 아이들과 미술교실을 진행하며 13살 이 되도록 물감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과, 제 손으로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수많은 어른들을 보면서 한국인들의 해외봉사에 대해 부정적이 던 내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문서 이해 능력은 세계 최하위일 지언즉 문맹률은 1% 미만으로 조사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말로만 듣던 한국 전쟁 직후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들 정도다.
이번 봉사활동은 내게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습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떠나기 전날 밤. 같은 방을 썼던 선생님과 숙소 옆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봉사활동 피드백을 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맞춰 형광색 불빛들이 수 없이 날아 오르기 시작한다. “반딧불이다”라는 말을 읊조리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릴적 고향에서 봤던 그 풍경이 떠올랐다. 문득 이곳에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이곳만의 행복과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을 잊고 있단 걸 인지했다.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 속의 안타까움, 아쉬움을 모두 버리고 뿌듯함만 갖고 내자리로 돌아가 더 멋있는 어른으로 성장해서 세상을 더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요즘 수많은 일들로 지쳐 있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고향 마을에서 꿈을 키웠던 3학년 최우호 어린이의 동심으로 돌 아가 힘내라고, 할 수 있다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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