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8월 빠융 파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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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층 아파트 노을이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감춰줘서 좋다. 생각이 많은 저녁 시간이다.
여느때처럼 양동이 물 한그릇 담아 손끝으로 물을 주고 있었다. 베란다의 초록이 눈앞에서 검붉게 아파트 밑으로 달려내려갔다. 유난히 목을 빼들고 자신을 봐 달라는 녀석이 있다. 한그루 파파야 나무다. 식모가 뿌려놓아 싹을 틔운 녀석이 내
키를 훌쩍 넘어 윗집에 인사라도 할 기세다. 두개의 작은 열매가 열려 나의 보호본능을 자극케해 비바람 칠때는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생명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 다 크지도 않은 채 여물어 어느덧 까만씨를 가진 파파야 열매가되어 4쪽으로 나뉘어져 식구들의 후식이 되었다. 오늘 자세히 보니 꽃한송이 끝에 봉긋한 알갱이가 달려 있다. 참 신기하다. 21층 아파트엔 나비도 없고 벌도 없는데 어떻게 노란색 파파야꽃이 거듭해서 결실을 얻는 것일까?
맞은 편 아파트 베란다에는 멀리서도 색깔이 선명한 짙은 핑크빛 꽃이 핀다. 내게 가끔 자신의 색 자랑을 하듯 강렬하게 나의 눈을 자극한다. 다른 초록은 보이지 않는데도 그 집 베란다는 풍성한 울림으로 나에게 소나타를 연주해준다.
눈을 좀 더 아래로 내리면 노란색 몸통을 한 대나무 몇그루가 초록과 어울려 베란다 담장을 친다. 길가다 쳐다보는 나그네도 없는데 늘 그랬다는듯이 어깨동무하며 집안을 감싸고있다. 집주인은 집안에서 사군자를 치고있지는 않을까?...
아파트가 숨을 쉬고 있다. 아니 베란다에 앉아 내가 숨을 고르고 있다. 아침 모종이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것도 아닌데 등에서는 송글송글 땀이 배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파파야 씨앗을 심는다. 농사꾼의 심정으로 정성을 들이는 내 모습을 아내가 부억창 유리넘어로 알수없는 미소만 띤 채 물끄러미 쳐다본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이나 하듯이... 이미 주인있는 화분옆 모퉁이 땅을 세 내어 뿌린씨앗이 싹을 터, 오히려 주인보고 나가라 할 기세로 자라는건 너무 오버다 싶다.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도 솎아내야 할 판이다. 햇빛도 제대로 쬐지않는 베란다 화분에 어떻게 이렇게도 아웅다웅 싹을 티울까?...
아파트 헬스장의 러닝머신앞 통유리창 너머는 몇그루의 키가 큰 나무가 첫 걸음을 뗄 때부터 인사한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고개 빳빳이들고 내 걸음걸이를 카운트한다.
내가 걷는속도로 제 몸을 흔들어 내 가뿐 호흡과 동무한다. 갑자기 어지럽다. 그도 그럴것이 날이면 날마다 찾는 헬스장이 아니니 오늘은 살짝 과했나보다. 아니 그게 아닌것 같다. 몇 마리의 참새떼가 공중비행하는 걸 쫒아가다 그만 못볼걸 봤기 때문이다. 아침 햇살 받으며 쫓고 쫓기는 사랑놀이를 훔
쳐보다 그만 러닝머신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몇분이나 걸었다고 다리가 풀린것일까? 창피한듯 곁눈질로 다시 오르려다 그냥 아파트 헬스장을 나왔다.
따가운 햇살인데도 불현듯 걷고 싶어 아파트 정원을 걷는다. 처음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파트는 아직도 꽃단장중이다. 참 느긋한 일정으로 아파트는 제 모습을 찾아간다. 만들었다 부셨다 다시 고치는 일이 일상이 된듯하다. 연못인듯 아닌듯 만들어 놓은 네모난 물웅덩이도수난을 받는다.차라리 용도를 알 수 없는 그 웅덩이를 메꾸어 푸른 정원을 좀 더 넓혔으면… 나무를 더 심어 그늘을 더 만들었으면…의자를 더 많이 설치해 쉼터로 만들었으면…아니 무대를 만들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해 주었으면…어린 아이의 귀청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나의 상상의 무대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앙탈부리며 제 엄마의 손을 뿌리치는 어린 소녀의 목청이 어찌나 큰지 아파트 건물 사이로 소프라노가 되어 울려퍼진다. 기분좋은 하루,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에게 말을 건다.
유난히 긴 아침시간을 보낸다. 커피 한잔 머금고 한국에서 보내오는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낯익은 선율에 어느덧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가 우렁차면서도 감미롭다. 용재오닐의 ‘섬집아기’ 비올라 연주는 눈시울까지 붉게 만든다.
21층 아파트의 아침이 무르익어간다. 밖에는 ‘여기가 인도네시아다’라고 어느새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 넓은 파파야의 잎에도 후두둑 후두둑 비가 내린다. 갸녀린 몸매로 빗소리 장단에 맞춰 춤추듯 나를 이끈다.
너는 언제까지 그곳에 서서 내 마음의 우산이 되
어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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