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3월 논설위원 칼럼/ 베니 장군의 그림자 <김문환 논 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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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장군의 그림자
김문환/논설위원
1993년 6월 자카르타 힐튼호텔 그랜드 볼룸, 그 넓은 행사장에 입추의 여지없이 방문객들이 모여들었 다. 그들은 불과 3개월 전에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난 베니 무르 다니(Benny Moerdani) 장군의 자서전 ‘애국군인 베니 무르다 니(Benny Moerdani, Prajurit Negarawan)’출판기념회가 열 리는 행사장을 찾는 시민들이었다. 국가가 난세에 처할 때마다 그 태풍의 중심에 들어가 영웅적 활약상을 보였던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자서전을 손에 넣기 위해, 또는 그냥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 고관대작부터 일반시민들까지 다투어 몰려든 것이다. 정권 실세인 무르디오노(Moerdiono) 국가비서장관 조차도 자리를 잡 지 못해 입구에서 서성거릴 정도였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2004년 8월 29일, 군사특 수전의 대부이며, 정보권력의 기획자로서 국내 정치를 주도했던 노병은 지병에 시달리다 72세 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4년 전 란짜마야 (Rancamaya) 골프장에서 라운딩 도중 뇌졸증 으로 쓰러졌다는 단신(短信)이 언론에 잠깐 비친 이후 끝내 비보를 전하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전군은 1주일 동안 조기를 게양하여 그들의‘영 웅’을 애도하였으며, 카톨릭 신자였던 그를 국가 의 제2인자로까지 과감하게 끌어 올렸던 수하르 또 전 대통령, 재야 지도자로서 특별한 친분을 쌓 았던 구스 두르 전 대통령, 소녀시절 부친으로부 터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 받는 역사적 순간을 직 접 지켜 보았던 메가와띠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베니 장군이 부통령으로 가는 길목을 끝내 차단하 고‘탈 베니 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던 쁘라보워 장군에 이르기까지 내노라 하는 전 현직 국가지도 자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고개를 숙여 애 도하고 있었다.
제2대 주한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한국과도 특별 한 인연을 맺었던 베니 무르다니 장군은 남산 기 슬 이태원 관사로 자주 걸려온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기록이 여기저기 남아 있기도 하다. 1974년 1월 소위‘말라리 사건’이라고 부르는 ‘반일폭동’ 직후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여 줄곧 인도네시아의 모든 정보권력을 장악하며 국내 정 치뿐만 아니라, 곤경에 처한 한국 진출기업에도 여러 차례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물론, 인도 네시아 정부차원의 정책시행을 통해 양국간의 외 교, 경제교류를 승화시켜 오늘날 한인사회가 이렇 게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70~80 년대 이곳에 진출한 동포들이라면 익히 알고 계 실 것이다.
조꼬위 정부가 출범한지 100일이 지나면서 서서 히 대통령의 인너 서클(Inner Circle)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루훗 빤자이딴 대통령비서실장, 안 디 위조얀또 내각비서처장, 쁘라띡노 국가비서장 관, 리니 국영기업부장관 등이 실세그룹을 형성 하고 있다. 루훗 빤자이딴은 10월 조각 당시 조 꼬위의 추천에 의해 정치안보조정장관 후보명단 에 올랐으나, 루훗에 대한 권력 쏠림현상을 경계 한 메가와띠 측에서 이를 비토하였다는 설이 흘러 나오기도 하였다. 2009년이래 루훗의 사업파트 너이기도 했던 조꼬위 대통령은 그 대안으로 대 통령비서실이라는 새로운 직제를 만들어 루훗을 그 수장에 임명하여 소장파 측근으로 자리잡고 있 는 안디 위조얀또 내각비서처장과 조화를 이루도 록 하였다. 루훗은 안디의 부친인 고 떼오 샤페 이 예비역 소장과 함께 베니 장군의 직계 군부인 맥에 속한다. 메가와띠의 후원자이며 조꼬위 선 대본부 고문이었던 헨드로쁘리요노 전 국정원장 도 베니 장군의 통솔기관인 국군전략정보사령부 (BAIS ABRI)에서 잔뼈가 굵은 동일 계보라 할 수 있다. 헨드로와 루훗은 각각 67년도, 70년도 육사 수석졸업생으로 똑같이 육참총장감으로 낙 점되어온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부친의 후광이 아직도 절실한 메가와띠 인맥도 현미경으로 들여 다보면 결과적으로 베니 장군의 인맥과 서로 얽히 고 있다. 수하르또 철권정치 하에서도 메가와띠 가‘야당전사’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그 이면에 는 절대적으로 베니 군부의 암묵적인 방임내지 지 원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용인술의 특색 중 하나가 부친 통 치시대의 측근, 또는 그 후손들을 중용하여 왔듯 이, 메가와띠의 지난 2001년 집권기간이나, 집 권당 당수로 군림하는 현재의 상황도 이와 다 를 바 없어 보인다. 고인이 된 따우픽 끼마스 의 뒤를 이어 국민협의평의회(MPR) 의장 잔여임기를 물려받았던 시다르또는 1966 년 수카르노 대통령의 마지막 부관이었 으며, 국영기업부장관으로 입각한 리
니의 부친은 수카르노 정부의 마지막 재 무부장관이었고, 조꼬위 내각의 재무부장 관인 밤방의 부친도 수카르노 말기, UI대학 총장을10년간 지냈다. 당시 서부깔리만딴지 역사령관을 지냈던 리아미자르드 국방장관의 부친도 수카르노의 추종자였으며, 그의 장인 뜨 리 수뜨리스노 전 부통령은 베니 장군의 직속 후 계자였다. PPP당 소속으로 종교부장관에 재선임 된 샤리푸딘의 부친은 수카르노의 마지막 결혼식 에 NU의 총재였던 이드함 할릿과 함께 증인으로 입회한 종교부장관이었다.
베니 장군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마지막 업적인 서 부이리안 군사작전 시 전쟁영웅으로 수카르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베니 인맥의 계보를 잇 는 헨드로나 루훗,위란또 장군 등이 지난 대선에 서 메가와띠를 중심으로 결집한 것은 메가와띠와 베니 장군 간의 50년 전의 인연이 맺어준 연결고 리 덕분일 수도 있다. 본문 서두에서 소개한 베니 무르다니 장군의 자서전 241쪽에 1964년 중반 자카르타 대통령궁(Istana Negara)에서 베니 소
령과 수카르노 대통령간에 이루어진 독대 대화를 아래와 같이(번역본) 소개한다.
짜끄라비라와(대통령경호실) 요원이 되어 달라는 요청은 이제 포기하고, 수카르노 대통령은 곧장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이번에는 천천히, 그리고 속삭이듯, ”진정으로 내 딸아이를 자네와 같은 영웅과 결혼시키게 싶네…”
대통령은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딸을 군인 과 짝짓고 싶어하는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베니는 이를 회피하기 위해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 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도 진심으로 베 니를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는 의도는 매한가지였 다. 그러나 베니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 었다. 왜냐면, 베니는 이미 선택된 약혼자가 있었 기 때문이었다.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자식 가진 연로한 부모로서. 아무리 (첫)사위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국가원수가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보다 신중한 단어를 찾아가며 거부 의사를 밝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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