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논설위원 칼럼 /이둘 아드하와 경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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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둘 아드하와 경호실
김문환/논설위원
지난 10월 5일 이슬람계는‘이둘 피뜨리(Idul Fitri)’다음으로 큰 명절인‘이둘 아드하(Idul Adha)’를 맞이하였다. 자카르타 중심부에 위치 한 이스띡랄 대사원에는 퇴임을 앞둔 유도요노 대 통령부부, 부디요노 부통령부부도 대통령궁에서 의 마지막 행사를 가졌다. 하사누딘 시나가 주임 설교사는 자신의 교시에서 인종,종족,종교에 상관 없이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화합하기를 기원하였 다, 그런데 노년층이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인이라면 50년 전 이날의 악몽을 떠올 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1962년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보내기 위 해 대통령궁에 몰려 들었다. 이례적으로 이날은 대통령궁이 개방되어 수카르노를 비롯한 일반시 민들이 함께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한창 식이 진행 중이던 도중 군중 속에서 갑자기 세발의 총성 이 울렸다. 그 총구는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는 수 카르노를 향한 총구였다. 경호원의 민첩한 방어로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국가원수의 목숨이 백척간 두에 몰린 상황이었다.
바로 5년 전 학부모 자격으로 바자회에 참석한 찌 끼니 초등학교에서 자행된 6발의 수류탄 투척사 건으로10명의 어린이가 희생되고 생사고비를 넘 긴 이래 대통령이 또 한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 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최고위층 인 나수띠온 국군총참모장은 경호체계를 대폭 강 화하는 획기적인 방안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1963년 대통령의 탄신일인 6월 6일3,000여명 으로 구성된 대통령경호실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짜끄라비라와’라는 산스크리트 어원으로 정하였으며, 사부르 대령이 경호실장에 임명 되었다. 육해공군에서 차출된 정예요원 200여명 은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지키는 경호대대에 소 속되었다. 이 경호대대 구성원은 대통령과 동향, 또는 신원이 확실한 측근으로만 구성되었다. 초 대 경호대대장에 보임된 운뚱 삼수리 중령은 불 과 1년 전 베니 무르다니 소령과 함께 서부 파푸 아해방 군사작전에 특공대로 낙하하였던‘전쟁영 웅’이었다.
이렇게 대통령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호실은 바로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계기가 되고 말았다. 첫째는 경호실에 소속된 단위 중에 외국국가원수, 또는 귀빈이 방 문하거나 국가의 중요의전 행사 시에 종족별 민속의상을 입은 고교생급 남녀 50쌍으로 구성된 100 명의 들러리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 단체 소속 단원 중 두 명씩이나 대통령의 동반자가 되어 대 통령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는 점이며, 두 번째로는 바로 경호대대장인 운뚱 삼수리 중령은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역사의 최대 변곡점인 된 ‘9.30 공산쿠데타사건’의 주역이 되었다는 점 이다. 1965년10월 1일 아침 7시 국영라디오 방 송을 타고 흘러나온 혁명공약 제1호를 발표한 당 사자가 바로 혁명평의회 의장으로 변신한 운뚱 중 령이었다. 일일 천하로 끝난 쿠데타는 수 많은 관 련자들을 사형장, 또는 감옥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 이듬해까지 전국적으로 40만명에서 100만명 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만들면서 수하 르또 32년 장기 집권의 원동력이 된 공포정치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지난 10월 중순, 조꼬위 대통령 당선자는 안디까 뻐르까사 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경호실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조꼬위 정부의 군부인맥 좌장격 인 헨드로쁘리요노 전 국정원장의 사위이기도 하 다. 헨드로쁘리요노 장군은 1996년 자카르타지 역사령관 재직 시, 메가와띠가 인도네시아 민주당 (PDI) 당수에 등극할 당시, 이를 저지하지 않고 방 관하였다는 이유로 한직으로 물러나며 좌천되었 던 전력이 있다. 베니 무르다니 군부인맥의 한 축 으로써 미래의‘참모총장감’으로 점지되어 왔던 유망주가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2002년 메가와띠 가 대통령에 등극하자 희생자였던 헨드로 장군은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아 국정원장을 역임하며 현 재까지 메가와띠와 정치행보를 함께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치사는 수하르또 군부정권 붕괴 이 후 외관적으로는 문민정부로의 이관이 가시화 되 어 왔으나 그 저변에는 아직 군부정치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인권문제’를 놓고 양 진영이 충돌할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룹 이 바로 헨드로쁘리요노, 루훗 빤자이딴, 위란또 등의 군부세력이었으며, 이에 맞서 쁘라보워 진영 도 유누스 요스피아 등 전직 특전사 고위장성들을 내세워 치열한 대리전을 치른 바 있다.
조꼬위가 지난 8월 당선인으로 확정되었을 당시, 이에 상응하는 경호가 실시되자, 조꼬위는 대중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평을 하며 규모를 축소하여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조꼬위의 친 서민적 행보 탓인지, 취임식 당일 저녁 모나스 광 장에서 펼쳐진 축하공연 때,
군중 속으로 파고 들 며 수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한국의 경 호 매뉴얼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점을 볼 수
있 었다. 1974년 육영수 저격사건 직후, 박종규 실장 이 물러나고
경호체계를 대폭 손질하는 과정에 문, 민 조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야전에서 복무중인 학군단 출신 장교들을 차출하여 경호실 요원으로 일부 보임한 것은 바로 필자가 군복무 할 당시 우 리 동료들의 이야기이다.
새삼스레 40년 전의 사 건들을 거론하는 것은, 지난 10월 25일‘대한민 국 ROTC 동남아총연합회 창립대회’참석차 자카
르타를 방문한 중앙회 회장 및 간부 몇몇이 바로 그 당시의 당사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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