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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호) 역경을 성공의 디딤돌로 삼은 사람들 이야기 - 5. 세계적인 원자력 전문가 정근모

9,809 2007.04.1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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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손은희
 
높이 솟은 울창한 나무일수록 땅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듯 범인이 따라올 수 없는 세상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일수록 그 삶의 뿌리를 파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역경이나 아픔이 서로 엉켜 든든한 뿌리를 이루고 있다. 어쩜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는 직조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과학자 정근모 박사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가 다른 성공자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많은 역경 앞에서 그는 참으로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종류의 묘목에 똑같은 햇빛과 물과 거름이 주어지더라도 좋은 토양에서 나무가 더 크고 우람하게 자랄 수 있듯 그에게는 ‘뛰어난 지성’이라는 좋은 토양이 천부적으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력을 보고 그를 천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51년, 전국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된 제 1회 국가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하게 된다. 그 놀라운 성적으로 경기 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경기고등학교에도 수석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차지했다. 또 경기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대학 검정고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그 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였으며 미국 유학 때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석사과정을 건너뛰고 박사과정에 들어가 2년 6개월 만에 학위를 받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일등코스만을 밟고 살아온 승승장구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실패를 모르는 우수한 일등 인생이지만 다른 모든 것까지 완벽히 채워지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일찍 부모를 여의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
평소 위가 좋지 않아 병석에 누워계시던 어머니는 그가 국가 고시를 치르러 가는 날 아침, 아들에게 “네가 전국수석을 하여 신문에 크게 네 얼굴이 실릴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시고 기력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한 모습으로 그가 시험치를 때 쓸 연필을 정성껏 깎아 주신다. 그는 ‘될성부른 떡잎’으로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대로 어린 정근모는 국가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해 신문에 대자보로 얼굴이 실리게 되는데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이 기쁜 결과도 보지 못하신 채 국가고시를 치른 다음날 하늘나라로 가시고 만다. 그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손에 쥐고 어머니의 묘소를 찾은 어린 정근모와 어버지는 그 기쁨만큼 눈물을 쏟아야 했다. 뛰어난 아들을 둔 기쁨을 속속히 함께 누리지 못하고 그런 똑똑한 아들을 남겨둔 채 어린 정근모가 중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삶을 마감하신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참으로 깨끗한 삶을 사셨던 어머니를 여인 아픔은 달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어린 정근모는 자녀를 위해 혼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로 인해 그 외로움을 극복해 갈 수 있었다.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는 어린 두 동생과 형과 누나, 그리고 아들 정근모를 정성껏 돌보셔서 비록 어머니가 없지만 남은 식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런 반쪽 행복도 오래 가지 못했다. 청렴결백 하셨던 아버지는 학교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재직 중 학교에서 한 학생이 유리창을 닦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성품이 온화하고 자상했던 아버지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된다. 자신이 학생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남의 집 귀한 자식이 학교에서 죽게 되었다는 심한 자책을 느끼신 것이다. 그 후 이 죄책감으로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괴로워 하시면서 조금씩 아버지는 건강을 잃어가신다.
 
소년 가장
그 일로 무거운 마음의 짐을 홀로 지고 괴로워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서서히 초췌해 가시다가 기어이 뇌출혈을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가 바로 1957년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6년만이었다. 중학교 시험을 앞두고 운명하신 어머니 그리고 그가 월반을 하지 않았더라면 대학 입시를 치르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을 아버지였다. 다행히 총명한 두뇌 때문에 2년을 월반한 덕분으로 대학생활을 조금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아버지의 죽음은 더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 되었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이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놀라운 성적에 대해 칭찬할 사람도,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어 줄 사람도 없는 그 상황은 절망 또 절망이었다!
 
 그 당시 그의 큰 누님은 이미 결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형은 군대에 입대해 있었기 때문에 두 동생을 그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공부하면서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순식간에 그에게 남겨진 것이다. 더구나 그의 가족은 학교 관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관사를 비어 주어야 했는데 대학교 2학년, 실질적으로는 고등학교 3학년인 그가 가장 노릇을 해야만 하는 입장은 엄청난 정신적인 부담이었다. 하지만 똑똑하고 올곧은 성품의 정근모는 주저앉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기울였다. 다행이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셨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이유로 학부모들은 성금을 모아 집을 한 채 사주었으므로 주거문제가 해결된 그는 여동생 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당장 먹고 살길이 문제였기에 그는 가정교사생활을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식모 할머니를 모셔들여 하숙을 시작했다. 이로써 일단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되었기에 그는 더욱 좌절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학업에 더 열심을 내었다. 그의 놀라운 성공은 이런 모진 아픔 위에 싹을 틔운 것이다.
 
초고속 인생
   부모를 모두 여윈 아픔을 가눌 길 없는 그였지만 타고난 지적능력으로 학교에서도 늘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이런 그의 성적은 교수들의 눈에도 금방 띄었다. 그는 행정대학원에서 1년간 공부한 다음 미시간 주립대학교로부터 유학제의가 들어와 미국으로 건너가 자격시험을 치른 결과, 40명의 학생 중 수석으로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후 그 어렵다는 박사과정을 짧은 시간에 마치고 ‘분자의 구조를 양자역학으로 풀어내는 것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박사학위를 받고 그는 바로 플로리다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는데 플로리다주 언론에서는 그의 교수임용을 ‘소년교수’라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그 후 1967년에 그는 다시 뉴욕공과대학의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핵융합연구소를 창설,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 연구소는 나중에 스타워스로 불리는 우주전략 방어 SDI의 주 연구소로 부상하였다. 이곳에서 미국 원자력위원회와 미국과학재단의 파격적인 연구지원을 받으며 그는 연구에 전념했다. 그리고 1971년 2월 16 그는 한국으로 날아와 과학 한국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한국과학원(KAIST) 출범에 동참한다. 이 순간이 그에게 참으로 벅찬 감격이었던 것은 그 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들을 한국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그의 나이 고작 서른 둘이었다. 젊은 나이에 한국과학원의 부원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승승장구하는 삶은 끝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그의 삶에 발목을 잡는 대 위기가 다시 기다리고 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자식에게 닥친 병마와 방황
유학시절 결혼하여 가정적으로도 두 딸과 아들 진후를 두고 단란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그에게 시련은 예기치 않게도 아들 진후의 건강을 통해서 왔다. 1974년 1월 한국과학원을 휴직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간염치료도 중요했지만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열 살 아들 진후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진후의 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만성 신장염 증세였다.
 
정근모박사는 어린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하나 나눠주기로 결심을 하고 버지니아 대학 병원 수술대에 아들과 나란히 눕는다. 아들의 생명만큼 그에게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있었겠는가! 그러나 수술경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물질에 대한 거부반응을 제어하기 위하여 투여한 약이 아들의 간을 해친 것이다. 처음에는 황달 증세를 보이더니 흑달로 돌아섰다. 온통 얼굴이 암갈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식 받은 신장의 원할 한 작용을 위해서는 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치료를 거듭한 결과 다행히 건강을 되찾은 진후는 다시 복학하게 되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건강을 되찾느라 동년배들보다 뒤떨어지게 된 학업문제 등으로 아들은 심한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병석에 있는 동안 너무나도 변해버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빗나가기 시작했다. 한번은 열흘동안 서너 번이나 자동차사고를 내기도 하는 등 아들 진후는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열등감과 좌절감에 쌓여 침울해했다. 신장 치료를 위해 계속 복용했던 약이 우울증의 원인이 된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든 현실들이 진후에겐 뛰어넘을 수없는 거대한 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겨워 하던 아들 진후는 결국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는데 한번은 차를 몰고 가다가 고의로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진후는 무사했다. 또 한번은 10여 미터나 되는 낭떠러지로 차를 몰고 뛰어 들었으나 차가 작은 소나무에 걸려 추락하지는 않았다. 두 번 다 생명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늘에 있음을 느낀 순간 이었다고 한다. 자살에 실패한 진후는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다고 슬피 울었다. 뛰어난 지성과 사회적인 탁월한 업적과 명예도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는 아무 힘도 되지 못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들의 고통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느끼게 되면서 과학자 정근모박사는 과학세계를 넘어선 영역의 절대자의 손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이렇게 아들의 병마와 방황속에서 아픔을 느끼며 그는 1982년 7월 한국 전력기술회사 사장직을 맡아 다시 서울에 정착했다. 직원은 3백명이고 자본금 30억원에 적자가 30억원 정도였던 위태한 기업을 맡게 된 것이다.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1천 4백 40분으로 미분하여 사용해야 할 만큼 할 일이 많았고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낸 결과 한국 전력 기술 주식회사는 점점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한 전기학회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1986년 1월, 그는 두 번째로 2년 임기의 한국 전력 기술 주식회사 사장직을 마치고 다시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동안 아들 진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기에 사랑하는 아들 진후의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 설레는 기쁨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생활에 한참 젖어 들고 있을 무렵, 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그 엄청난 피해는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유럽에서는 급히 원자력의 안정성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는 세계의 원자력 학자들로 구성된 12인 자문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를 마친 다음 워싱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진후가 뇌출혈을 일으켜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동안 써오던 약이 아닌 새로운 약을 투여하여 내부에서 부작용을 일으킨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근모 박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행히도 진후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정상을 되찾아갔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마비되었던 부분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두통증세도 사라져 갔다. 그리고 아들 진후는 그 후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여 예쁜 딸과 아들을 낳고 오순도순 생활해 간다. 진정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정근모박사에게는 세상에 그 어떤 성공보다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진후에게 찾아온 이런 평안한 생활이 계속되지는 못했다. 2001년 1월, 진후는 뜻하지 않은 담석 수술로 중환자실에 다시 눕게 된다. 그 동안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신장이식, 복막투석, 투석을 위한 혈관수술, 재투석을 위한 수술, 신장 재이식 등 여섯 번의 큰 수술을 받았던 아들 진후가 다시 담석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담석수술 후 뇌출혈을 일으킨 후, 진후는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아버지보다 더 먼저 이 땅을 하직하게 된다. 26년 동안이나 신장염을 앓아오면서 누구보다도 신앙심이 깊어졌던 아들 진후는 죽음을 맞기 전, 천사를 보았다고 미소지으며 말하고 너무나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간다.
 
신앙의 힘으로 역경을 이기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둘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환란을 당한 정근모 박사지만 그는 그 모든 것 가운데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림이 없듯 이런 모진 풍파 앞에서도 그는 초연히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자기 삶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초연하고 의연한 그의 정신적인 힘의 근원에는 신앙이라는 커다란 뿌리가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신앙으로 다져진 평온하고 온화한 그를 대하는 사람마다 “과학자가 어떻게 크리스찬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과학자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몹시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과학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증명적인 것인데 반해서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 과학과 신앙은 부합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말한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할때는 관찰, 실험, 논문측정, 조사의 과정을 거칩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과학적인 태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태도로 사랑, 자유, 우정, 아픔, 고독, 죽음, 생명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보다 더 높은 서열의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말씀처럼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서 이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에는 분명히 서열이 있습니다. 가시적 진리가 있는가 하면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라고...
 
그는 현대과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삼라만상을 원격조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느끼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세월이 그에게 필요했다. 그가 그 절대자의 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그 중심에는 아들 진후의 끊임없는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들 진후의 고통으로 인해 그는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자의 손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믿음안에서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닌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영적인 시각을 갖게 되자 아들의 죽음마저도 믿음으로 평안히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많은 역경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뚜렷한 일의 우선순위를 갖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평생에 그가 지켰던 일의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에 두었다. 그는 아무리 세상일이 바쁘고 중요하더라도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앞서야 한다고 믿고 주일날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둘째로는 가족에의 책임이다. 가족에 대해 책임을 못 지는 사람이 사회에 봉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이 가정에 불충실하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쓰라린 아픔을 준다든지 자식에게 무심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에 선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맡은바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맡은 일에 뜻과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삶은 과학적인 업적만을 남긴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도 앞장섰다. 집 없는 사람에게 사랑의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을 비롯하여 사랑의 쌀나누기,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런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1998년 에는 태평양연안 원자력 회의에서는 국제 원자력상을 수여했고 세계원자력 한림원에서는 최초로 공로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정근모박사가 이룬 과학적인 업적은 가히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이지만 그는 자신이 아는 과학의 세계를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과학의 틀 안에 갇혀 인생의 모든 것까지도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교만이 아닌 그 과학도 전우주를 움직이는 분의 손안에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임을 인정! 하고 겸손한 태도로 삶을 일관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미시건 주립대학교 이학박사, 프리스턴 대학교 핵융합연구소 연구원, MIT공대 핵공학과 연구원, 뉴욕공대 교수, 한국과학원(KAIST)부원장, 한국 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과학기술처(12대, 15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해비타트)이사장, 국제 해비타트 이사, 사단법인 기독 학술교육동역회 이사장,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회원, 미국 국립공학 한림원회원, 스웨덴 왕림공학 한림원 회원, 세계원자력 한림원 회원, 호서대학교 총장 등 그는 범인이 한가지도 따기 어려운 직함을 이렇게 많이 소유한 탁월한 인물이지만 냉철한 지성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냉정하고 딱딱한 학자풍 대신 그의 얼굴에는 인자함과 겸손함이 넘쳐흐른다. 그 겸손함으로 그는 인생의 성공도, 고난도 모두 절대자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진실로 큰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며 나는 글을 쓰는 내내 정근모박사의 인품에 사로잡혔다.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많지만 진실로 존경할 만한 위대한 인물이 드문 이 세대에, 세계적인 명성과 따뜻한 인품을 함께 소유한 균형잡힌 지성인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참고문헌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
(정근모지음)
 
 
독자의소리를듣습니다.
이메일:alexxb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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