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4월 4월의 행복에세이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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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미학
서 미 숙 / 수필가, 시인
하늘빛이 회색으로 짙어지는 해질녘의 오후 에 FM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듣고 있노라 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나른한 행복감에 젖는다. 전파를 타고 전해져 오는 감성적인 멜로디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역시 아름다운 음악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나긋나긋한 방송 진행자의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영국에서 미적 감각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어느 공작이 재계에서 이름난 부호의 초대를 받고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부호는 공작에게 찬사를 듣기 위해 집안을 유럽의 고급가구와 장 식들로 가득하게 치장을 했다. 거실과 침실 및 창 문의 커튼, 조명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화려 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드디어 공작이 부호의 집에 도착하여 이리저리 집안 곳곳을 둘러보고도 고개만 끄덕일 뿐, 정작 기다리는 부호에게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대접을 받고도 묵묵히 앉아있던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집안이 너무나 화려하고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군요. 조금은 비어있는 여백의 공간도 있었더라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공작은 이 한마디를 남긴 채 감사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문득 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주변과 안팎을 돌아보면 버리고 없애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우선 우리의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는 많은 생각들과 불필요한 인성의 이끼 같은 것들은 과감히 내려놓아야 하는데 잘 되질 않는다. 집안에도 가득 쌓여있는 가재도구며 장롱마다 넘쳐나는 옷들과 꼭 필요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집안 곳곳의 꾸러미들은 자꾸 늘어만 간다. 그러고도 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하여 매일 사들이고 충동적인 구매로 시간을 소비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지식이든 물질이든 어느 것 하나라도 더 얻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만 받아왔지, 한 번도 내려놓고 비워내야 하는 교육법은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우는 법을 터득하려고 무수히 많은 종교에 의지하고 정신수양도 하며 애를 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돈이나 물질, 권력 같은 사사로운 욕심, 질투와 불만과 이기주의 등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생각은 다 내다 버려야 하건만 그것을 깨닫기까지 어쩌면 평생 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린다.
나 또한 마음 비우고 생각 내려놓는 법을 터득하기 위하여 노력 중이다. 우선 마음을 담아놓은 세월의 찌꺼기들을 비우고 집안 곳곳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틈만 나면 버리고 또 버린다.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눈만 뜨면 생겨나는 탐욕은 잠시라도 방심의 틈을 주면 또 다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사람들의 창고는 언제나 넘쳐나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백화점에서 세일행사라도 있는 날이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쇼핑백에 새로 산 물건들이 가득 들려있다. 집에 가져와 보면 그다지 급한 것도 아닌 별로 필요한 것도 아니건만 여전히 새것에 새로운 물품에 연연한다.
나 역시 그랬다. 어쩌다 백화점에서 쇼핑한 물건들을 집에 와서 풀어보면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한다. 아직도 비우는 법을 익히지 못하고 날마다 새로운 내면의 탐심에 저항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 책상에는 언제나 비우는 법을 새롭게 깨우쳐주는 법정스님의<무소유>라는 책이 있어 시간만 나면 꺼내어 읽는다.
‘일상에서 소용되는 그 많은 물건들,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필요한 것들일까? 살펴 볼 수록 없어도 좋은 것들이 적지 않다.’‘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도 되지만 그만큼 세상 사에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법정스님의<무소유>중에서도 나는 이 글귀를 무척 좋아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삶의 지침서가 될 만큼 무소유의 삶은 늘 내 마음 속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때로는 너무나 깔끔떠는 아내와 엄마로 인식될 만큼 잘 나누어 주고 잘 버리고 열심히 정리정돈을 하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법정스님의 말씀 언저리에 도달하려면 아직 도 까마득하다. 그만큼 세상 때를 벗지 못하고 있음을 통감한다. 의미는 다르지만 다이어트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신체적인 비움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때로는 종교의식으로 며칠간 금식을 하는 사람들도 종 종 본다. 몸에 쌓여있는 노폐물을 다 체외로 내 보내고 깨끗하게 내면을 비운 후의 경이로움, 그런 신체적 비움의 의식은 누구나 한번쯤은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 같다.
나는 매번 신체적으로 비우는 다이어트엔 실패하기 일쑤지만 나의 일상생활에서만큼은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고픈 마음 간절하다.
지금 지상에서는 계절이 바뀌고 있다. 이곳 인도네시아는 우기에서 건기로 옮겨 가느라 하늘에서는 때 아닌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고 비 폭풍을 쏟아 부으며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한국의 계절도 떠나가는 겨울이 막바지 매서운 꽃샘추위를 날리며 쉽게 비워내지 못하고 다가온 봄을 시샘하고 있다. 겨울과 봄의 문턱에서 잔인한 4월의 오묘한 기운이 교차한다. 나는 한바탕 옷장의 옷을 정리해본다.
구석구석에 있는 옷들을 다 꺼내어 찾아 입을 것은 입고 입지 않을 것은 과감하게 구분해 놓고 나누어주고 처리한다. 부엌에도 싱크대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반드시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들을 구별해 놓는다. 거실 탁자에 있는 이런 저런 월간지와 신문들도 앞으로는 한두 가지로 줄여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 안에 있는 깊이 뿌리내린 끝없는 채움의 열망을 차근차근 파헤쳐 보고 정리해 보려고 다짐한다. 비어있는 곳에는 청정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곳에는 무거운 짐도 없고 자유로움과 채우기 위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있어서 편안히 숨을 쉴 수 있는 곳, 행복을 나누는 마음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빈 공간이기에... 아직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법정스님이 남기신 심오한 비움의 미학인 무소유의 향(香)을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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