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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집약산업에 이어 기술집약산업 등 제조업 투자 진출 1988~1992년 기간에 한국 기업의 대인도네시 아 투자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섬유 1980 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성화(Sung Hwa Dunia) 1980년대는 한국 1990년대 이후에는 인 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 중국이 전 세계 생산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1980년대 후 반기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따른 노동쟁의 증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인도네시아 정치·경 제와 사회적 혼란 상황에서 과거 경영관행에 익숙 했던 대부분 한국계 신발기업은 경영 악화에 직면 한다. 이에 인도네시아 신발 투자기업 1세대로 분 류될 수 있는 성화 2001년 인도네시아에서 첫 한국 드리마가 방송된 이래 2001년 한국 드라마의 첫 방송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냈다. 또 IMF 이후 매 우 어려운 인도네시아 경제 상황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고 200만 켤레 2024년 2/4분기 對 인도네시아 해외직접 투자(FDI) 13억 불로 3위를 기록 이번 리셉션은 「특별한 동반자 2045년 선진국 도 약을 목표로 하는 인도네시아의‘2045 골든 인 도네시아 비전(Indonesia Emas 2045)’ 실현 을 위한 최적의 파트너가 한국임을 강조하였다. 박수덕 대사대리는 한국의 인도네시아 투자가 금년도 2/4분기에는 전체 해외투자국 중 3위를 기록하는 등 양국 간 경제 협력이 눈부시게 발전 하고 있다고 환영하면서 2차 제조업 3차 서비스 산업 4차 디지털 산업 등으로 단계별로 산업이 발전했지만 4차 산업이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에 살아도 언어와 문화 CJ 등과 같은 전 자와 바이오 산업이 진출해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 시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1993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최저임금 인상률이 급등하자 CJ 등과 같은 투자성공 사례를 낳는 기반 을 마련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 봉제와 신발 등 노동집약적 한국 기업이 동남아 국가를 투자 대상으로 주목한 이유 는 원화의 절상 K-POP K-POP 및 한국 농식품 등 AI 기술을 접목 한 체험부스에서 다양한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 는 기회도 가졌다. 이외에도 참석자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 국민이 함께 팀을 이루고 있는 ‘송창근 밴 드-Selalu Cinta’가 연주하는 양국의 대표적 대 중가요 공연을 즐기고 ▲Fly together(2023년 양국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대사관 직원이 작사 KMK Team KoreaIndonesia)」 슬로건 하에 개최되었으며 ‘특별한 동반자 “Namo Buddhaya” (불교 인사) “Om Swastiastu” (힌두교 인사) “Salam Kebajikan” (유교 인사)” 등 각 종교의 인사말을 2~3개 섞어서 대중연설을 시작한다. 비평가들은 “종교분쟁은 종교가 이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2000년대 아체에서는 강성 이 슬람과 온건 이슬람 주민 간 충돌 “Shalom” (기 독교 인사) “다양한 종족(민족)성을 인정하는 인식들” 그리고 “한류 콘텐츠를 소비하는 지역 소비자들의 주도성”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비해 “종교와 종족에 대한 폄하 인식 또 는 차별적인 인식” 등은 문화적 혼종성을 생성하는 데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했다. 최 박사는 안도네시아에서의 한류는 현재 문화다양성을 지향하는 가치와 이슬람 가치 사이에 존 재한다며 ▲한국 문화원(KCC) 가루다인다와 가습기도 가파른 원화 절상 및 임금 상승에 따른 제 조비용 상승으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악화하면서 국내 노동집약적 중소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모색 하게 됐고 각 종족을 대표하는 아나운 서 즉 외모가 다른 사람들이 표준 억양과 발음의 인도네시아어로 뉴스를 전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을 보면서 머리를 도끼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가 있다. 도끼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고 상처가 남지만 허물어진 경계를 넘는 새로운 생각의 촉수 도 생겨난다. 이를 통해 내 나날의 삶과 사고가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끝] 간디 술리스티얀토 대통령 자문위원(前 주한인도네시아대사) 등이 참석 특히 건설 등 한국 기업들이 이미 현지에 진출해 있었던 터라 인도네시아에 직접투자는 진출에 따른 초기 비용 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고대 중동 사막에서는 현대 한국과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체계 가 형성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무슬림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접 하는 이슬람과 무슬림은 서구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과 건설 노동자들이 경험한 아랍국가의 이슬 람이 대부분이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 골까르당과 연합개발당은 인물 중심의 여러 정당으로 갈라졌다. 한편 투쟁민주당은 수많은 성향의 집단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총 재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돈이 있어도 바나나를 마음껏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절대적인 공급 부족. 1990 년대 말 파푸아에서는 바나나가 귀했다. 파푸아는 토양이 척박하고 농사가 막 시작된 상황이어서 바나나와 파파야 같은 열대과일조차 귀했다. 도시처럼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바나나와 파파야 를 먹으려면 재배하거나 타지역에서 재배한 것을 사와야(유통) 한다는 것. 당시에 한국은 농사도 유통도 발달해서 어디서나 비용을 지불하면 사과와 배를 마음껏 살 수 있었으므로 공연예 술 분야 증진을 위해 한국과 협력하고 있으며 교류와 투자 등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만 들어내고 있다. MZ세대와 무슬림과 한류가 만나서 이루는 상호작용 인도네시아 MZ세대와 Post-Z세대와 한류가 글로벌 문화현상으로 주목을 받고 변모하는 시점 에서 글로벌화와 민주화의 형향을 받은 사람들로 교육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이 더욱 확대되 어 나갈 것임을 확신하였다. ※ 한국은 2023년 기준 인도네시아의 6위 투자국이며 (홍콩 제외) 그 ‘세계성’ 에 참여하는 통로로 K-POP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류 그들은 교역하면 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국가가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이슬람교 신자 즉 무슬림 수가 가 장 많은 국가이지만 세속국가이다. 세속국가는 종교국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기존의 생각을 뒤흔들어 새로운 시각을 열 어주는 강력한 도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후에 많은 작가와 문학 평론가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인 박웅현이 자신의 저서 『책은 도끼다』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내 입장에서 ‘책’을 ‘인도네시아’로 바꾸면 기타 이념과 종교 세력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 로 모은 민주당(PDI. 현 투쟁민주당 PDIP)로 나눴다. 52 I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그래서 이념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아닌 종교적으로 이슬람과 비이슬람(민족주의)으로 나뉘는 것.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고 개혁 시대에 접어들면서 난로도 필요없다. 대신 거의 모든 음식을 냉장 고에 보관해야 한다. 쌀을 상온에 두면 쌀벌레가 생기거나 곰팡이가 생긴다. 옷장에 제습제를 넣 “인도네시아는 도끼다”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I 51 어두어도 옷을 입을 때 눅눅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현지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샤워한다. 한국 에서는 피부가 건조해진다고 샤워를 자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하면 ‘땀 띠’와 ‘습진’ 같은 피부질환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성경 속에 묘사된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들 이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노사분규 농촌개발 뉴발란스 다양성과 이슬람 가치 사이에서 인도네시아는 건국 이래로 문화다양성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인 특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대규모 무 역수지 적자를 겪으면서 경상수지 적자를 면치못 했다. 인도네시아는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가 증가 했지만 정확한 외채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 로 금융과 자본시장에 대한 관리감독이 소홀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자국의 통화가 고평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정책 당국은 조정을 주저했다. 결국 인도네시아는 외환위기를 맞으며 1997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구조조정계획 절차를 밟게 됐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동시에 발생한 외환위기 로 현지 한국계 기업들은 위기를 맞는다. 1997년 경제 위기와 1998년 이후 민주화 과정의 정치사 2. 제조업 중심의 한국기업 투자 급증: 발전기(1986~2002년)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53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회적 불안정은 한인 사회 존속을 일시적으로 위협 했다. 특히 1998년 5월 폭동 때는 5천여 명의 한 인들이 비상 탈출해야 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을 귀국시킨 뒤에도 많은 한국계 기업 의 임직원들이 현지에서 근무하면서 인도네시아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정상적으로 가동했다. 이때 부터 인도네시아 관리들이나 현지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려울 때 도와준 진정한 친구라고 여긴다. 2) 25만명 고용을 창출한 한국 신발업체 신발산업 가운데 스포츠화의 경우 1970년대는 일본 대로를 벗어나면 저 소득국가의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자연환경이 다르면 생활방식이 바뀐다.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열대기후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여 름옷만 있으면 된다. 겨울옷도 대부분 국가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한국도 세속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정치면에서 민주주의 국가이고 경제면에서는 자본주의국가이다. 종교국가는 아니지만 이슬람교를 포함해 개신교와 가톨릭 대상지로 동남아와 중국이 부상했다. 당시 한국과 대만의 신발제조업체들이 대거 동남 아와 중국 등지로 생산기지를 이전시킨 배경에는 나이키 대회 [칼럼] 인도네시아도 주도적으로 한류 콘텐츠를 활용한다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I 51 기간 내내 거리응원을 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을 통해 방영되면서 도로에는 태평양전쟁 시기부터 1990년 최신 모 델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자동차 모델이 모두 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자바어 나 순다어 같은 종족어를 쓰고 공용어는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다. 당시에 저녁 6시 에는 모든 채널에서 국영방송국이 제작한 동일한 뉴스를 방송했는데 도손(Doson Indonesia) 도시 소비자 눈에는 농사도 유통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국가가 한국과 같은 단계로 발전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전국에 유선전화망이 설치되 기 전에 무선전화로 이동했다. 자기 집 전화번호를 가져보지 못하고 개개인이 핸드폰번호를 갖게 된 것이다. 인터넷도 유선망이 도시를 중심으로 깔리다가 이동통신으로 넘어갔고 독재자 수하르토 동 양(Dongyang Indonesia) 동조 동조(Dong Joe Indonesia) 땅그랑은 수도 권의 대표적인 한인 집중 거주지로 부상했고 리복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먹는 것은 허용했다. 2000년대 초반에 테러 사건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테러의 피해자들이었다. 실제로 인도 네시아에 처음 이슬람을 전파한 사람들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아랍 무역상들로 문화교류 문화적으로 지속가능한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 ‘창조경제’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이 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디지털 전환과 맞물려 디지털 콘텐츠 산업뿐만 아니라 관광산업 미숙한 인력관리 등으로 현지 사회와 갈등을 빚었 다. 한편 인도네시아로 집중되던 노동집약적 중 소 규모 제조업 투자는 1992년 이후 중국과 베 트남이 신규 투자처로 부상하면서 한때 하락하기 도 했다. 1990년 초부터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점차 기술집약산업의 투자가 이루어진다. 도자기 생산 공장인 한국세라믹(한국도자기)과 피아노와 악기 제조회사인 삼익인도네시아(삼익악기)가 각각 설 립됐다. 이어 LG전자 민주투사 메가와티 봉제 불 교와 유교 브레베스 등지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조성하고 있 다. 2016년 이후 한국계 신발업체의 인도네시아 내 이전(반뜬주에서 중부 자바주 또는 수도권에 서 수방과 가룻 등 서부 자바주 외곽지역)이 가속 화돼 화승 삼 성전자 삼성전자 선진국과의 통상마찰 등 국내외적 경영 여건의 나빠졌기 때문 이다. 당시 동남아 국가 가운데 인도네시아는 노 동력이 풍부하고 비교적 임금이 낮았을 뿐 아니 라 스타윈 스타윈 (Starwin Indonesia) 신 발회사 직원들의 소비는 땅그랑 지역경제에 활력 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중 국과 베트남이 새로운 생산기지로 부상하였고 신발 아구스 장관이 힘차게 골을 넣자 ‘2045 골 든 인도네시아 비전’ 향해 양국이 함께 나아간 다는 의미의 대형 영상 메시지가 등장하여 장내 를 압도하였다. 이외에도 리셉션장은 체험부스 운영 및 밴드 공 연 등 한국 문화 홍보행사로 다채롭게 채워졌다. 리셉션 참석자들은 ▲올해 우리기업의 인도네시 아 내 사회적기업활동(CSR)을 총망라한 홍보영 상 및 국군의날 기념 홍보 영상 ▲주인도네시아대 사관 Youtube 채널 영상 ▲한국 관광·음식·음 악 등 문화 홍보 영상 등을 시청하였으며 아니스 바 스웨단 후보의 지지자들은 ‘아니스 버블’(아니스@aniesbubble)이라는 엑스(구 트위터) 팬 계정을 중심으로 아니스를 홍보하는 트위터와 틱톡 게시물과 라이브 방송 그리고 커피트럭 같은 한류 팬덤 문화를 적극 활용했다. 대선 후보들조차 한류를 언급해야 할 만큼 한류 현상이 인도네 시아 사람의 생활에 스며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아디다스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의 빅바 이어들이자 브랜드 마케팅 기업들이 개발도상국 인 동남아와 중국 등지로 글로벌 밸류체인을 재편 했다. 인도네시아는 1990년 전후 한국의 중소자 본이 가장 선호한 투자대상국으로 아식스 등 글 로벌 브랜드 제품을 연간 1억3 알루 도홍 환경산림부 차관 암본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주민 간 유혈충돌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너무 달라서라지만 이슬람끼리도 온건과 강성으로 나뉘어 충돌 한다고?’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 언론 기사와 책을 찾아보고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니 선주민과 이주민 집단과의 충돌이라는 것. 표면에 드러난 것은 종교지만 실제로 교리 싸 움은 아니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거나 이주시킨 이슬람 또는 온건 이슬람 성 향 주민들과 원주민인 기독교 또는 강성 이슬람 성향 주민들이 정치와 경제적 이익을 두고 경쟁 하다가 충돌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모든 나라가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정당은 한국 기준으로 하면 보수 성향에 가깝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집권한 후 정당을 직능 대표자들로 구성한 집권당 골카르당 앞으로 도 양국이 한팀(team)이 되어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협력해 나가자는 의미에서 박수덕 대사대리 와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 농지공간기획부 장관이 팀을 이루어 축구공을 골대에 골인시키는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현재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고 있는 신태용 감독이 영상 메시지를 통해 전달한 사인볼 을 박수덕 대사대리가 아구스 장관에게 패스하였 고 앞으로도 무역. 투자뿐 아니라 식량안보 야자수 양국 관계의 새로운 50년을 시작하는 원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로 개최되었다. ※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1973.9.18. 외교관계 수립 박수덕 대사대리는 환영사에서 한-인도네 시아‘특별 전략적 동반자(Special Strategic Partnership)’관계가 오는 10.20 출범하는 인 도네시아 신정부와 함께 새로운 50년을 향해 나 아가게 되었다고 축하하면서 예능 등 한류 콘텐 츠가 20년 이상 인기를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이 사용한 물건들을 구입하거나 K-POP 댄스를 따라 하던 일방적인 수용이었다. 최근에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 콘 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카르타 롯데몰에서는 주말이면 K-POP 팬들이 모여서 K-POP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화장품을 구입한다. 자카르타 딴중바랏 지 역에 위치한 이온몰(Ieon Mall)에 있는 K-POP 댄스 스튜디오에서는 시간당 강습료 8만 루피 아 정도를 내고 K-POP 댄스 중 한두 동작을 1시간 가량 배우고 짧은 동영상을 찍는 것으로 마 무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쇼핑몰에서 놀이기구를 타거나 영화를 보듯이 잠시 K-POP 댄스를 배울 수 있게 상품화한 것. 2024년 대선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정치 왕조를 만들려 한다는 비판에 대해 ‘정치는 이데 올로기 경쟁인데 감정싸움으로 생각한다며 K-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며 K-드라마 를 언급했다. 간자르 후보는 본인의 인기가 K-POP 스타만큼 되지 않느냐고 물었고 오히려 세속화가 아닌 ‘자아실현’과 ‘더 나은 가치’에 대한 욕구이며 완구 등 노동집약산업을 중 심으로 인도네시아의 저임금 외교단 및 동포사회 등 총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 농지공간기획부 장관 내외 우리의 마음과 사고를 깨우고 이 말은 책이 단순히 정보를 전 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것이 인도네시아에서 한류 콘텐츠가 지속해서 확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바탕이 됐다. 이를 위해 인도네시아는 2013년 한국과 ‘창조산업양 해각서’를 체결하고 다양한 창조경제 분야에서 협업 이는 한국기업의 해외투자와 인 도네시아 진출에 큰 교훈이 됐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신발산업 이 2005년 파크랜드(PT Parkland World Indonesia)의 풍원제화 인수를 계기로 현지 한국 신발제조업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 어 창신(Chang Shin Indonesia)과 태광(Taekwang Industrial Indonesia) 등 대규모 한국 신 발기업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신발업계가 제2의 도약기를 맞는다.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집권 후 인도네시아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대외 여건이 변화하면서 제조업이 회복하기 시작했고 이들 종교 축일을 국가공휴일로 기념한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 은 “”Assalamu’alaikum warahmatullahi wabarakatuh” (이슬람인사) 이번 리셉션은 2023년도 ‘한-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이어 이불도 이슬람 이슬람세력을 모은 연합개발당(PPP) 이제 오지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엑스가 운용하는 미국의 저궤도 우주인터넷 통신사업인 스타링크 도입 을 언급한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통신발달사에는 시티폰과 삐삐 시대가 없다. 철도와 도로가 전 국에 건설되지 못한 상태에서 항공편으로 군도의 섬들을 연결하고 있다. 한국은 농업과 광업 등 1차 산업 인 도네시아 신발업계가 어려움에 직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3년 이후 인도네시아 최저임금 인상율이 연간 10%를 상회함에 따라 인도네시아 에서 생산비 절감 효과가 낮아진 동시에 한국에서 더 가까운 중국과 베트남이 대안 생산기지로 부상 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을 계기 로 중국의 생산원가가 급속도로 인상되면서 중국 54 I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에 진출했던 한국계 기업 중 일부는 한국으로 U턴하거나 인도네시아로 재이전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신발제조 투자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반뜬주 땅그랑을 중심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한류 수용에 중 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창조경제’ 정책은 가장 뚜렷한 한류 수용 전략 인도네시아는 창조경제 전략을 새로운 성장동력이자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경제 전략으로 선 택하고 인도네시아가 문화다양성 사회로 유지 확대되는 데 한류가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했 다. 다만 이것조차 한류를 수용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선택과 실천의 결과일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최 박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한류 콘텐츠가 인종과 젠더 인도네시아는 글로벌 평균 이상의 높은 점수를 계속 보이면서 인도네시아는 내가 한국에서 쌓은 생각의 경계를 부수는 도끼였다. 인도네시아에서 보고 듣고 경 험하면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고 그것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촉수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는 도끼다”라는 문장은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처음 말한 것으로 알려진 “책은 도끼다”라는 말을 패러디했음을 먼저 밝힌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 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신발제조업체로서 첫 투 자회사인 코린도그룹의 신발사업부 가루다인다와 (PT. Garuda Indawa 일명 이글)가 1980년 중 반기에 가동을 시작해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던 만 큼 해외투자에 경험이 없었던 한국 신발업체들은 가루다인다와의 선례를 공유할 수 있었다. 한국계 신발제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1985 년 가루다인다와가 첫 테이프를 끊은 이후 일반특혜관세제도(GSP) 수혜를 받고 있었던 만큼 한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의 투자가 몰렸다. 하지만 영세한 자본의 중소기업이 다수 진출하면 서 현지 언어와 문화의 이해 부족과 장시간 노동 임금 상승 자동차 등 기간산업 분야와 플랜트 건설 및 사회간 접자본시설 확충 부문에도 대거 참여했다. 다양한 산업의 진출과 더불어 현지 한국계 기업을 주로 겨 냥한 손해보험 서비스를 목적으로 1996년 삼성화 재(현지법인명 PT Asuransi Samsung Tugu)가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 1997년 KB손해보험 (KB Insurance)과 1998년 메리츠화재(Meritz Korindo Insurance) 등이 각각 진출한다. 1990년대 들어 수출 호조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내수도 증가하고 주식시장과 부동산 부문 모두 활 황을 보였다. 하지만 경기 과열에 따른 물가 상승 과 부동산 시장 등의 거품이 발생했고 작곡한 헌정곡) 영상을 함께 시청하면서 양국 국 민 간 협력의 의미를 되새겼다. (제공: 한국문화원) 재인니 한국상공회의소(Kocham)와 재인니한인신발산 업협의회(KOFA)를 중심으로 다시 반등의 기회 를 마련했다. 최근 자바섬 내 최저임금 차별화의 이점과 조코 위도도 정부(2014~현재)의 국토 균 형 발전 정책에 부응하여 한국 신발기업은 중부자 바 주도 스마랑 주변의 즈빠라 지역과 살라띠가 저소득국가’ 등이었다. 하지만 1999년 7월 수카르노하타국제공항에서 자 카르타 시내로 이동하면서 본 도로를 호위하던 초고층빌딩들은 저소득국가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 말에는 한국에서도 초고층빌딩이 드물었다. 자카르타 시내 중심가에 는 최신형 벤츠부터 낡은 바자이와 목초를 실은 소달구지까지 함께 다녔고 조립금속 등 ‘중간기술 제조업’과 철강 종교와 엔터테인먼트를 구별하여 인식하는 태도를 보인다. K-POP 커버댄스에 참여하는 무슬림 여성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종교성’과 연관 짓지 않고 종족과 인종이 다를 수 있다. 1990년대 말 한국은 한민족이 한국어를 하며 한반도에 사는 나라였다. 서울에서 외모가 다른 외국인을 보면 쳐다보던 시절이었 다. 인도네시아에 오니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하지만 종족이 다르면 외모도 언어도 달랐다. 심지어 자카르타에는 전세계에 모든 사람들이 오가고 종합상사 지역과 계층 문제에 대해서 풍부하고 성숙한 인식이 장착된 콘텐츠로 성장하고 문화다양성을 수용하는 글로벌 문화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했다. [끝] 지하드 전사 짧은 기간 동 안 노동집약산업을 중심으로 ‘처음이자 집중적 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 후반 당시에 한국은 중국과 베트남과 수교 이전 시기였던 만큼 부산에 밀집되었던 신발 제조업체들이 이전을 고려한 국가는 태국과 인도 네시아였다. 앞서 인도네시아에는 1960년대 후 반부터 원목개발과 합판제조 창신 총 35 억 달러 매출액을 기록해 인도네시아 수출실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코리네시아 코리네시아(Korinesia) 금강제화 등이 대규모 생 산설비를 갖추고 주문자상표 생산방식(OEM)의 체제를 구축했다. 초창기 진출한 신발기업들은 동 양을 제외하고 모두 자카르타 외곽 땅그랑 지역에 공장을 세웠다. 1992년 한국이 중국과 베트남과 수교하면서 두 나라는 한국의 주요 투자지로 부상했다. 이를 계 기로 글로벌 신발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태광 등 대기업들이 이러한 대이동을 주도하고 있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내 한국계 신발업체는 노동집 약적인 산업에서 생산시스템을 자동화하는 장치 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2020년 현재 KOFA는 신발제조회사 20여개 회원사와 자재 및 임가공 회원사 180여개 등 총 200여개 회원사가 참여하고 있다. 회원사는 한국 인 근로자 2천여명과 현지인 근로자 25만여명을 고용해 나이키 태화 등이 2005년을 전후하여 폐업 절차를 밟는다. 인도네시아 진출 초창기 한국 신발기업들은 반 뜬주 땅그랑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식 대량생산 제 조라인 설비를 갖추고 OEM 방식의 유명 브랜드 주문을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직접 경영방식을 채택한 우리 신발기업은 해외투자 경 험이 없었고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노 동자와 갈등과 마찰을 빚어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고 태화(Tae Hwa Indonesia) 테러리스트... 돼지고기를 안 먹 는 것은 맞았지만 투자보장협정(1991년 2월) 등 을 통한 체계적인 제도 구축에도 힘입은 바 크다. 1990년대 초반에 기술집약산업인 전자산업과 바 이오산업의 진출이 시작되어 오늘날 LG전자 팀 코리아-인도네시아’리셉션 개최 - 대한민국 국경일 및 국군의날 기념 리셉션 계기 양국 관계의 새로운 50년의 원년 선포 - 농지공간기획부 장관 팀 한국-인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 농지공간기획부 장관과 박수덕 대사대리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9 도네시아(Special Partnership 파크랜드 풍부한 자원 및 적 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에 힘입어 한국기업 의 현지 투자가 급증했다. 이는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11월) 프라타마 프라타마(Pratama Abadi Industri) 한 국관광공사(KTO) 및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aT)에서 행사장 내 설치한 한국 악기 한국 캐 릭터 한국과 너무 나 다른 나라인 인도네시아로의 이주는 지리적인 국경을 넘어서 나의 사고의 틀을 깨고 생활 방 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가야 한다고 들었을 때 떠오른 단어는 ‘열대 한국음식 한국이 인도네시아인에 게 매우 매력적인 나라로 다가왔다. 2006년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전략적동반자관계를 수 립하면서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한류를 통해 ‘자기개성’을 발견하고 ‘자기 개발의 수단으로서의 한류’를 체험한다. 최경희 박사는 이러한 경험이 새로운 인도네시아 청년 무슬림 세대의 시대성을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무슬림 여성들은 종교와 취미 한류와 이슬람적 가치가 상호작용해 만들어지 는 문화적 혼종성을 발전시키는 요소로는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이 모두 공감하는 “아시아라는 정체성” 한류의 대중적 인기와 함께 고속 성장의 단계를 보여 주고 있다. 2016년 이후 단 6년 만에 문화콘텐츠를 접촉하는 미디어 수단이 전통적인 TV에서 온라인과 소 셜미디어(SNS)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인이 스스로 콘텐츠를 선택할 수 있는 수용자 로서의 주도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가 인기를 지속하고 성장하는 이유 최 박사는 한류 콘텐츠 자체의 우수성과 한국 측의 확산 노력과 함께 인도네시아가 내적인 변화 의 단계라는 점을 주목했다. 인도네시아는 1999년부터 국가체제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 환하는 개혁 시대를 맞이했다.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의 개혁을 원하는 열망은 새로운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또 민영 방송사가 증가하면서 ‘검증된 해외콘텐츠’를 수입해 방영했는데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한류 콘텐츠를 주 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는 고속 성장 단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최경희 연구교수는 ‘인도네시아 한류의 수용과 수행에 나타난 문 화 경제적 상호작용 연구’라는 논문에서 인도네시아에서 한류가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고속 성 장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한류현황지수와 한류심리지수로 구성된 한류지수가 인도네시아인을 대상으로 2015년 이래 계속 조사되었는데 해외투자 자본의 성격도 좀더 자본집약 적 산업으로 전환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석유 화학 환경산림부 차관 등 인도네시아 정부 고위인사 포함 총 700여명 참석하여 ‘팀 코리아-인도네시아 골 세레모니’ 응원 10월 1일 주인도네시아한국대사관 주최로 대 한민국 국경일 및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팀 코 리아-인도네시아’ 리셉션이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gus Harimurti Yudhoyono) 농지공 간기획부 장관을 주빈으로 인도네시아 정. 관. 재계 인사 및 군 장성 힌두교를 인정하고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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