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행복에세이 <서미숙> /11월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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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단상
서 미 숙 / 수필가 gaeunsuh@hanmail.net
밀린 원고 정리로 까만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 는다. 새날이 어스름한 새벽안개의 군무로 인왕산중턱을 휘감고 있다. 베란다 창
문을 여니 싸한 찬바람이 안겨든다.
초겨울 인왕산의 아름다움이 내곁에 있다. 황홀하다. 어젯밤의 지친 시간은 무구한 자연 속으로 흡입되고 빛나는 새 시간이 열리
는 기분이다. 간밤에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가을비가 내렸다. 세차게 부는 바람소리에 창틀이 휘파람 소리를 내듯 꿈틀거렸다.
아마 거리에는 떨어진 은행잎이 비에 젖어 흩날리고 있을 것이다. 밤새 거친 빗살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자연들이 일제히 제
기색을 찾는다. 저 멀리 산중턱에서 서서히 햇살이 비추고 모든 사물이 생기를 찾기 시작하는 시각,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밝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 짧은 순간을 음미하며 나는 어제의 고단함을 벗고 잠시 평온함에 잠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욕심이 없어진 탓일까, 돌아보면 나는 늘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관망해 오듯살아온 것 같다. 여유가 있어서
가 아니라 점점 더매사에 치열하게 도전하기 보다는 체념하고 안도하기를 더 좋아하는 어쩌면 게을러진 탓이기도 하다. 소심한
성격이다보니 그런 삶의 태도는 은연중 나의 기호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화창한 날보다는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하
고 음악도 장조의 쾌활함보다는 애조 띤 구슬픈 단음계 가락을, 화려한 원색보다는 채도 낮은 중간색 색조를, 그리고 토요일 오
후 보다는 금요일 저녁을 좋아하는 말하자면 적극적 참여보다는 방관자적 안일을 즐기는 편이다. 여명(黎明)을 마다하고 굳이 어
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에 산책을 더 열심히 즐기는 것도 이 같은 나의 성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노을이 스러져간 저
녁 빛은 체념 속에 드리워진 화해와 포옹, 그리고 다음날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가 담긴 부드러움으로 포근히 나를 감싸준다.
이제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며 떠나려는 11월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11월은 하루를 마감하는막 어둠이 드리우기 전의 저녁 빛
과 닮아있다. 가을이라기엔 너무 늦고 겨울이라기엔 다소 이른, 가을과 겨울이 함께 몸을 섞는 달이다. 욕망의 굴레를 막 벗어 던
지고 난 후의 홀가분함이라고나 할까. 가을날, 한때 화려했던 색의 잔치도 끝내고 떨어뜨릴 것, 버릴 것, 다 털어버리고 빈 몸으로
선 나무들의 모습, 그래서 11월의 바람 끝에는 마지막 잎새의 여운이 한자락 묻어 있는 것 같다. 마른 잎의 냄새를 닮아서일까, 커
피 향이 유난히 좋아지는 것도 이때쯤이다. 낙엽이 두텁게 깔린 아파트 공원에 앉아 별빛 같은 불빛들을 헤아려보며뜨거운 자판
기커피 한 잔에 철없는 낭만을 꿈꾸어보게 하는 그런 달이기도 하다. 11월은 가난하고 쓸쓸한 달이다. 풍경(風景)도, 소리도, 빛깔
도 여위어 바람마저 적막해진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느끼는 11월은 오히려 여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넉넉하다.“빈들의 맑은 머리
와/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던 김현승 시인의 시구처럼, 마음이 가난하다면 더 맑아질 수 있고, 쓸쓸하
기에 도리어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달이다. 그 때문일까. 문학의 달이기도 한 11월은 산문보다는 시가 한결 맛이 있어지는 달
이기도 하다.
절제된 언어, 응축된 사유, 행간의 여백이, 군더더기를 다 털어 버리고 가뿐해진 11월의 모습을 닮았다고나 할까. 다가오는 겨울
의 느낌은 무겁다. 오래된 침묵처럼 지루하고, 새 생명을 잉태해야하는 부담감으로 홀가분할 수가 없다. 소생을 준비하는 내밀한
움직임으로 은근히 부산하기까지 하다. 겨울을 일컬어 정중동(靜中動)의 계절이라 함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11월의 느낌은 가볍고 신선하다. 방금 비운 그릇에 남아있는 온기처럼 지난 것에 대한 미련이 사뭇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체념의 편안함이있으며 충만을 꿈꿀 수 있어 훨씬 자유롭다. 하지만 이런 여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연말이라는 회오리를 등
에 업은12월이 이내 밀려오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해의 12월은 대선을 치루는 달이라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고 분주한 움직임이
다. 그렇게 부하뇌동의 소란함과 초조함 속에서 12월 은 후회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금요일
밤을 좋아하듯 한 해의마무리와 다가오는 새해의 시작 준비를 11월부터 하는 것도 나름대로 그런 까닭이 있음이다.
남은 12월, 한 달의 의미는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날들을 계획할 수 있는 차분함을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11월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작은 설렘이 있는달, 운이 좋으면 첫눈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남아에 오래 산 까닭에 아직도 첫눈을 떠올리면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폭설이 아니 라도 좋다. 대개는 무서리
럼 살포시 대지를 덮고 상고대처럼 가볍게 빈 가지를 채우는, 떠나는 가을에 대한 겨울의 예우와도 같은 차분하면서도 다소곳한
그런 눈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내 수첩의 11월의 칸에는 고국의 첫눈소식이 올라와 있곤 했다. 이 나이에도‘첫’이라는 글자가 가슴을 설레
게 하는 유일한 것은 아마도 첫눈’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 와서 체류 중인 올해는 특히 이런 나의 기다림을 아는지 떠나는 11월의
모습이 미안함에 젖어 있다. 12월 에 내리는 첫눈은 11월의 눈만큼 내게 신선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그저 겨울눈에 불과할뿐이
다. 때로는 폭설이 되어 일상에 불편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첫눈이 없으면 어떠랴.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면 마른 가지 검게 물들고 그가지 사이로 잿빛하늘과 둥근 까
치집이 걸리는 11월의 풍경, 왠지 모를 아련함, 그 색채의 빈곤 함마저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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