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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이모저모 Jalan-jalan Jakarta <사공경>/자카르타역사감옥박물관

7,681 2012.08.0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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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역사감옥박물관

Museum Sejarah Jakarta (Museum Fatahillah)

 

사 공 경 / *인니문화연구원장이 박물관의 설립목적은 자카르타의 문화유산을

수집, 연구하여 이를 보존하고 홍보하는 것이다.선사시대유물부터 최근 20세기까지 다양한 소장

품이 전시되어 있어 식민시대의 역사를 알아보는데 알맞은 장소이다. 총독이 애용한 가구와 세간,

회화, 오래된 지도, 총독의 초상화, 중국에서 온 도자기들이 볼만하다.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전인 1908년 지식인들이 시작한 국가부흥운동부터 1945년 독립선언

때까지의 크고 작은 중대사를 결정하는 장소였다. 1925년부터 1942년까지 서부자바주 정부사무

소로 운영되었고, 일본 점령 시(1942-1945

)에는 Dai Nippon(위대한 일본) 병참보조보관소가 되어 일본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1952년부터

도시군대의 주둔지로 운영되었다.

 

독립을 성취한 후에 이 건물은 0503 서부자카르타군사령부로 사용되다가 1968년부터 자카르타시

에서 관리하게되었다. 마침내 1974 3 30, 시장 알리 사디낀 (Ali Sadikin)에 의해 자카르타역

사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파따힐라박물관이라고도 한다.

 

파따힐라(Fatahillah)광장과 연결된 400년 역사를 지닌 자카르타역사박물관은 네덜란드 동인도회

(VOC) 기간에 바따비아(Batavia: 네덜란드식민지 때자카르타명칭)시청으로서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다채롭고 오랜 역사를 지녔다. 빨간 석조 정문이 아름다운 이 건물은 이보다 반세기 전에

세워진 암스테르담시청(지금의 네덜란드 왕궁)과비슷하며, 바따비아시청은 수많은 네덜란드 식

민지시절의 우수한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바따비아 건설의 장본인 꾼(Jan Pieterszoon Coen) 총독이 1627년에 이 건물을 건축했는데 이때

감옥도 같이 만들었다. 그는 4(1619~1623) 6(1627~1629)총독이었다. 박물관출입

구에서 중심홀로 곧게 걸어가면 왼쪽 벽면의나무판에 네덜란드 말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649년에 건물 지하에 감옥을 더 많이 만들었다.“이 시청은 Johan van horn 총독이 1707 1 23

일 보수에 착공했으며, Abraham van Riebeeck 총독이 1710 7 10일에 완성했다.

 

그 후 재건축은 없었으나, 인도와 중국에서 가져온 두께가 50cm, 무게가 100Kg인 바닥의 돌 때문

에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청건물 건축에 관여한 총독은 3사람이었으며 모두 폭정을 했다. 특히 꾼(Coen) 총독은

비정상적으로 잔인했고, 술탄 아궁과 전쟁 후1629(9 21, 42)에 콜레라로 병사했다.현재

역사박물관 왼쪽에 와양박물관(Museum Wayang)으로 알려진 네덜란드묘지에 묻혔다.식민지시

절에 이곳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회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법이 선포되었고, 결혼식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죄수들의 감금, 처형 등여러 가지 사안을 취급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시청을 일

컬어‘말하는 건물(Gedung Bicara)’이라고도 했다.

 

감옥

네덜란드정부의 법에 대항했던 바타비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고, 식민정부에서는 그들

에게 수입의 75%를 세금으로 요구했으며, 이를거역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투옥했다.

때로는 자바의 왕들까지도 투옥되었다. 주로 세금을 못내는 사람이었지만 온갖 잡범, 성추행범,

도둑, 사기꾼, 심지어 미친사람까지 같이 수감했다.수감자는 300명이 넘었다.

 

남자감옥 건물 뒤편에 있는, 비가 오면 물이 차는 다섯 개의 감방에는 투옥된 죄수들의 발과 팔에

매어 두었던 50kg 25kg의 쇠뭉치가 있는데,그 형언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들을 생각하자 깊은심

호흡 없이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한 사람에게가로 세로 60cm, 50cm의 공간이 제공되었고, 한감

방에 40-50명씩 수감했다. 여러 명이 한 방에


서 먹고 자고 비위생적인 실내화장실을 사용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 콜레라 같은 전염

병이나 설사병으로 죽어갔다. 그 유명한 독립영웅디뽀느고로(Diponegoro) 왕자도 북부 술라웨시

마나도로 망명가기 전에 여기에 투옥되었다.

 

나는 2003 723일 한밤에 박물관 내부를 순회하는 이벤트에 참가했었다. 지하감옥에 실제로앉

아서 당시의 고문방법과 감옥생활에 대해 들었는데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한달

내에 20%의 수감자가, 3-4개월 내에 85%의수감자가 죽어 나갔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우물감옥 남자감옥과 함께 건물 되편에 있는, 주로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우물감옥은 더 비참했

.8미터 깊이의 우물에 죄수를 5, 6명 정도 집어넣고 쇠창살로 된 덮개를 덮는다. 그리고 시청 앞

에있는 분수대에서 우물의 수위를 조정한다. 분수대에서 시청 입구까지 보도블록이 약간 솟아있

는 것은 우물감옥으로 통하는 배수관 때문이다. 서서히목까지 물을 채우고 거머리를 집어넣는다.

그러면2, 3일 내에 사람들이 죽는다. 우물 밑쪽에 위치한자바 해로 연결된 터널 문을 열면 시체는

바로 바다로 떠내려간다. 이곳에서 나는 세균실험으로 희생된 일제 식민지시대의 민족시인 윤동

주를 생각했다. 우물 밑의 수로는 순다끌라빠항 부근의 전망대까지 이어지며 지하 통로의 길이가

8km나 된다. 우물에 물을 뺀 뒤에는 군대가 이동하는 통로로 사용했다.

 

여자 감옥 이 건물 앞쪽 왼쪽 끝에 붙어 있는 여자죄수를 수감하는 감방은 높이가 1미터에 불과해

사람이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당시 죄수들의 수감 기간은 대체로 1년이었으나, 그들이 석방되

어 나올 때 제대로 걸어 나올 수 조차 없었다고한다. 습기가 차고 불결해 이곳에서 나환자가 나오

기도 했다.

 

지하고문장소 건물 앞에는 높이 2미터, 길이 31미터의 반지하 통로가 있는데, 고문을 할 때는 물

을 채우고 거머리 같은 벌레를 넣어 죄수의 고문장소나 수감장소로 사용했다. 2차 대전 후 BC

전범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던 자피낭형무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일제에 의해 강

제로끌려 왔던 한인포로 61명이 수용되었다. 연합군

군사재판에 회부된 한국인들은 모두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이들은 전쟁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포

로수용소 감시원으로서 포로학대죄(포츠담 선언)로‘전범’이라는 억울한 죄명으로 감금당했다.

본인 전범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된 한국청년들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광장

공개처형장 나는 비틀 걸음으로 광장으로 걸어나왔다. 일제시대 우리의 감옥은 더 비참했다던

데……. 시청 꼭대기의 종탑에서 세 번째 종이 울리면, 광장이나 정문 왼쪽에서 죄수를 공개 처형

했는데 지금은 그 잔인한 역사의 광장에 가로등이 쓸쓸히 서 있었다. 아직까지도 타워에 있는 종

1742년에 주조되었으며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공개처형은 1896년까지 계속되었다.

 

사형수들은 저녁 전에 사형장소로 옮겨지고 시청의 꼭대기 팔각타워에서 아침에 첫 번째 종이 울

리면, 흰옷을 입은 사형수를 법정에 옮기고 그가유죄임을 마지막으로 확인한다. 두 번째 종이 울

리면 죄수를 사각(死角)지대인 사형대에 올리고,

판사가 건물 입구 위쪽에 앉아 사형을 선고한다.

세 번째 종이 울리면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집행은 유난히도 노예들이 많이 당했다. 가장 잔혹한

형벌 중의 하나가 찔러 죽이는 고문이다. 이 광장에서 온갖 고문이 행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봤다

는것은 일종의 공포정치가 아니었나! 몸에다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찔러 감염시켜서 서서히 죽이

,목마에 죄인을 태우고 무릎에 무거운 돌을 올려

놓거나 도르레에 돌을 달아 발에 떨어뜨리는 일,온몸이 부스러져라 때리는 고문, 희생자들은 몇날

며칠을 심한 고문과 고통으로 마지막 죽기 전까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살상욕(殺傷辱)

수반한 심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땅에 묶어 거대한 바퀴를 몸 위로 굴려 죽였다. 이러

한 고문과 형벌들은 평온한 파따힐라 광장(시청광장) 또는 성 앞의 교수대의 사각(死角)지대와똥

(Tongkol)거리에서 거행되었다. 민병 한 소대는 시청을 밤에 지켰고 어떤 사람이라도 가까이오

면 채찍질을 했다.

 

때로 시청광장은 활기찬 행사와 공공시장과 결혼축제가 벌어졌다. 중앙에는 멋진 팔각의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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