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Jalan-jalan Jakarta <사공경> /불멸의 특급오성장군 수디르만 동상
짧은주소
본문
Jalan-jalan Jakarta
자카르타의 5대 동상 그 첫 번째
불멸不滅의 특급 오성장군 수디르만Sudirman 동상
JL. Sudirman<BNI 건물 앞>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수디르만 장군 동상은 거수경례를 하면서 고개를꼿꼿이 들고 있는 출정직전의 군인의 위엄이 느껴
지는 모습이다. 수디르만 장군은 네덜란드 재침략에 대항하여 족자에서 게릴라전을 총지휘한다. 장
군은 죽을 때까지 투쟁을 하겠다고 수까르노 대통령에게 다짐하는 그때의 그 모습을 동상에 담은
것이다. (1948년 12월 19일) 심한 결핵을 앓고있는 그는 주로 긴코트 차림이었다
자카르타의 5대 동상 중 가장 늦게 만들어진 수디르만 동상은 높이가 6.5m이고 동상받침의 높이가
5.5m 포함해서 총 높이가 12m이며, 무게가 4톤이다. 예술가이며 반둥공대 교수 수나리오(Sunaryo)
는 다른 작품과 달리 이 동상은 자카르타 정부가 원하는 모양대로 제작했으며, 사업가들이 후원을 했
으며 총 35억 루피아가 들어갔다. 예술가 수나르뇨는 이 동상을 제작하고 1억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상은 국가기념탑 모나스(Monas)와 직선거리에 자리한다. 자카르타의 4대 동상, 슬라맛다땅
(Selamat Datang), 영웅 동상(PatungPahlawan . 빠뚱 빠흘라완), 건설하는 청년 동상
(Patung Pemuda Membangun . 빠뚱 쁘무다 믐방운), 하늘의 아버지 동상(Patung Dirgantara .
빠뚱 디르간따라)이 모나스를 향하듯이.
2003년 8월 16일. 당시 자카르타의 시장 수띠요소 (Sutiyoso)가 자카르타의 공원처장 마우리츠
나삐뚜뿔루 (Maurits Napitupulu)와 수디르만장군의 친척 대표자 하눙 파이니(Hanung Faini)
와 함께 동상의 준공식을 가졌다. 거수경례를 하는 사람은 수드리만 장군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
가는 사람들이 장군에게 거수경례를 해야 한다고파이니시는 강한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사진
처럼 장군의 이미지는 주먹을 꽉 쥐고 수까르노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죽을 때까지 나라를 지키겠
다고 하는 다짐하는 장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있다.
이 사진은 독립선언서작성박물관(Museum PerumusanNaskah Proklamasi, Jl. Imam Bonjol
No.1 Menteng), 45년 독립투쟁박물관(GedungJoang 45, Jl. Menteng Raya No. 31) 등에 전
시되어 있다.
수디르만 장군은...
족자 Banyumas에서 1916년 1월 24일 향후 인도네시아의 혁명가가 될 아이 Sudirman이 태어났
다. 아버지 Karsid Kartawiraji와 어머니 Siyem사이에서였다. 그후 의붓아버지
Raden CokroSunaryo
가 원명 앞에 Raden이란 직함을 붙였다.
Taman Siswa에서 정규교육을 마치고 나서 Solo의 HIK Muhammadiyah 교육 대학에 입학하였다.
1934년에 이슬람교 단체에 열정을 쏟던 수디르만은 Cilacap의 Muhammadiyah 초등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마음이 넓고, 교사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포용력이 있는 교장이었다.
본부가 Bogor에 있는 PETA (Pembela TanahAir)라는 국가방어단체에 가입할 때부터 군 경력
이 시작된다. 훈련이 끝나자 Banyumas의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한 지 몇 주 지나서 일본은 인도네시아 연합군에 무기를 넘기기
로 하였다. Banyumas 지역에서 공격을 지휘하는Sudirman은 무고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애
썼다. 참을성이 있고, 인격적이고 아버지답게 부하들을 잘 지켜주는 Sudirman은 1945년 12월 8
일에 인도네시아의 인민군 보안 (TKR, TentaraKeselamatan Rakyat) 지휘관에 공식 취임되었다.
당시 나이가 29세였던 Sudirman은 단호하고 현명한 결정으로 유능한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그외에 인도네시아연합군에 다양한 세력을 결합시키는데 성공하여 TKR 인민군보안군에서(후에
TRI(Tentara Rakyat Indonesia)로 명칭이 바뀜)1947년 6월 3일에 마침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TRI가 ABRI (Angkatan Bersenjata RepublikIndonesia : 인도네시아국군)란 명칭으로 바
뀌었을 때는 ABRI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독립전쟁을 인도하였던 장군은 심한 결핵을 앓고 있었다.
수까르노 대통령이 수디르만 장군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수디르만 장군은“아픈 사람은 장
군 수디르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 수디르만입니다.
장군은 아파도 안되고 나약해서도 안 됩니다.”라고 치료를 거절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38
세(1916년~1950년)의 젊은 나이로 인니인들에게 사랑과 용기 . 애국심을 심어주고, 1950년 1월
29일 중부자바의 마글랑 (Magelang)시에서 장군은 서거(逝去, wafat)한다. 독립영웅이란 직함으
로 족자의 스마끼(Semaki)에 있는 꾸수마 느가라(Kusuma Negara) 영웅묘지에서 잠들어 있다.
1997년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장군들(수하르또, 나수띠온)같이 특급 장군 직함을 얻었다.
수디르만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장군과 관련된 작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자카르타
외에 족자와 수라바야에 수디르만 장군 동상을 제작하고 인도네시아의 여러 큰 도시들에는‘수디
르만’이름을 중요한 길 이름으로 사용하고, 중부자바의 뿌르워끄르또(Purwokerto)에는 수디르
만장군대학교가 있다. 잘 아시다시피 자카르타 가장 중심부에 있는 거리(잘란)가 수디르만이다.
수디르만 장군은 반쪽의 폐로 숨쉬기가 힘들어도국가와 민족의 어두운 현실을 개탄하며 애써 겔리
라전을 지도하였다. 건강이 악화되어서도 가마를타고 숲속으로 들어가 계곡을 건너고 산을 타며
군대를 지도하고 게릴라전 전략을 세웠다. 족자에서 말랑까지 7달 동안을 아픈 몸을 이끌고 때로
능선 위로 굽이치는 비를 맞으며 그렇게 하였다.
육군중앙박물관(Satriamandala Armed ForcesMuseum, Jl. Gatot Subroto 147)에는 수디르만
장군방이 있고 그곳에 그때의 그 가마가 전시되어있다. 그 가마에 담긴 것이 너무 많아 목울대를 지
긋이 누르지 않고서는 볼 수가 없다.
어디서나 가롯 유다(Judas Iskariot)는 있는 법.수디르만은 무명의 한 군인으로부터 배신당하였
다. 그 배신자는 네덜란드군인에게 수디르만의 은신처를 알려주고 포위당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전략작전이 뛰어났던 수디르만 장군은 군대들과함께 사롱을 입고 뻬찌(peci) 모자를 쓰고는 코란
을 공부하는 척해서 네덜란드군인을 속였다. 배신자는 감사한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고 생각한 네덜란드 군인에게 총살당한다.
게릴라전이 끝나고 네덜란드 군인들이 돌아가자,마침내 수디르만 장군도 1949년 7월 10일 군대
를 이끌고 족자로 돌아온다. 족자 사람들은 반쪽폐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독립 전쟁을 지휘한, 자
랑스러운 수디르만 장군을 온몸으로 맞이하였다.
사실 게릴라전 동안 수디르만은 체력이 서서히 줄
어들어서 가끔씩 쓰러졌고, 그래서 더욱 창백하고마른 몸으로 세계악에 짓밟히는 약소국 인도네시
아의 운명 앞에서 처절하게 투쟁한 장군을 족자에서 다시 맞이할 때 모든 날들이 새로웠을 것이다.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함께 있었던 치열한 전쟁에 용감히 참가한 수디르만 군대 군인들도 수디
르만의 병색이 완연한 바삭 마른 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성하던 반쪽 폐마저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수디르만 장군은 빤띠 라삐(Panti Rapih)에 입원하
였다. 수디르만 장군이 참석할 필요가 있는 회의나의논을 병원에서 하였다. 결국 1949년 8월 1일에
군인직을 사임한다는 탄원서를 수까르노 대통령에게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은 그의 탄원서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원서 내용은‘영원히 변하지 않은인도네시아공화국이 소유하는 단 하나는 인도
네시아의 국민군이다’라고 쓰여 있다.
인도네시아는 수디르만장군의 투쟁을 영화로 만들고 있다. 2012년 7월
에 상영될 이 영화의 첫편은 찔라짭(Cilacap)에서 Muhammadiyah학교에서 선생님이 되는 장면,
두 번째 편은 족자에서 투쟁하는 장면, 마지막 3편은 독립혁명이 일어날 때 게릴라전에 참가하는
장면으로 구분되어3편으로 제작된다. 이 영화를 통하여 인도네시아사람, 특히 청소년들이 애국심과
협동심, 리더십,열정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그곳에 가면 꿈과 희망을 외치며 시대정신을 선도
하고 있는 그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수디르만 장군은 잘란 수디르만 입구에서 오늘도 외친다.
“인도네시아는 피와 땀, 굳은 의지로 독립을 얻었습니다. 장군은 절대로 나라가 위급할 때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도네시아를 지킬것입니다.”1948년 12월 네덜란드 군에 대항하기 위해 수까르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다짐했던 그말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