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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호) <한인사회의 뿌리를 찾아서> 제13부 전범(戰犯)으로의 전락과 35년간의 인권투쟁

9,943 2007.06.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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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의 뿌리를 찾아서> 제13부 전범(戰犯)으로의 전락과 35년간의 인권투쟁

자카르타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 항으로 달려 나온 1,300여 명의 군속들을 별도로 승선시킨 수송선은 곧장 부산 항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 군속들은 모두 싱가폴에서 하선(下船)이 명령되어 창이(樟宜) 수용소와 오트럼 수용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들은 전격 체포되어 전범색출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고려독립청년당원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 곳에서는 영국군과 호주군 관련 전범 용의자들이 색출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영국군과 호주군의 체포를 면한 군속들이 안도의 숨을 몰아 쉬며 고향산천을 꿈에 그려보는 순간도 잠깐, 이제는 화란군이 기다리고 있는 자바 섬으로 다시 보내지며 또 다른 형극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자바로 다시 돌아온 군속들은 자카르타 시내 찌삐낭(Cipinang) 형무소와 글로독(Glodok)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양쪽 형무소에는 이미 많은 조선인 군속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화란 전범으로 체포되어 싱가폴로 이송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화란군에 의한 인도네시아 영토 내에서의 전범재판은 1946년 8월 5일 자카르타 법정이 개정됨을 시작으로 12군데에서 열렸고 1949년 12월 14일 역시 자카르타 법정에서 마지막 선고를 내리는 것을 끝으로 폐정되었다. 3년여의 이 전범재판에서 총 448건, 1,038명이 기소되어 236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이 중에는 조선인 4명, 대만인 2명이 포함되었고 유죄선고를 받은 705명 중 64명이 조선인 출신이었다. 화란법정에서 내려진 226명이라는 사형선고 숫자는 전범재판이 열린 각국 재판기록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숫자였으니 그만큼 형벌이 가혹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유독 화란법정에서 중형이 내려진 이유는 무엇인가?

자바포로수용소는 전쟁포로와는 별도로 1944년 3월부터 포로수용소와 인접한 장소에 억류소(抑留所)를 추가로 설치하여 11만 명에 달하는 연합국의 민간인들까지도 구금하였다. 엄청난 수의 적성국가 민간인들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관리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자 일본군은 1942년부터 일본군 보조요원으로 현지인들을 징병하여 결성한 병보(兵補) 병력 중에서 3,000여 명을 차출하여 연합군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들을 감독하는데 투입하였다. 아무리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세상이라지만 수 백 년 간 인도네시아의 지배자였던 화란인들 앞에서 ‘고양이 앞에 쥐’ 행세를 했던 현지인들에게 화란군들이 입었던 군복과 총칼을 그대로 착용시켜 일본군들의 끄나풀이 되어 하루 아침에 옛 상전들을 감옥에 가둬 짐승 취급하는 현실을 화란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더구나 350년 동안 화란인들이 잘 길들여 놓은 압제통치의 틀을 불과 3년 반 동안 완전히 허물어 현지인들 입에서 ‘독립’이니 ‘자주’니 하며 떠들고 다니도록 고삐를 풀어 이제는 통제불능 상태로 변해버린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책임을 일본군에게 돌리려는 화란인들의 분노와 증오심이 그대로 분출된 곳이 바로 전범재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군부는 이러한 화란군의 보복을 예견했음인지 종전 직후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패전 5일 만인 1945년 8월 20일 일본 육군성 포로관리부는 “포로 또는 억류자를 학대했거나 악감정을 산 일본군들을 신속히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라. 그것이 불가능하면 행방을 감추도록 조치하라.”는 극비명령을 각 포로수용소에 은밀히 하달하였다. 이 약삭빠른 조치로 인해 상당수의 일본인 처벌 대상자들이 면책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책임은 고스란히 말단직인 조선, 대만 출신 군속감시원들에게 전가되었다. 한편 이때 행방을 감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 일본군 출신들은 무려 최소 800명에 이르렀는데 바로 서부자바 지역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거나 처형된 국재만, 정수호, 양칠성도 그들 중 일부였다.

고려독립청년당 사건으로 수감 중 종전과 더불어 석방되었다가 다시 화란군에 의해 전범용의자로 체포된 이상문(李相汶)이 글로독 형무소에서 가까스로 석방된 시점은 1947년 2월이었다. 석방되기 전까지 수없이 ‘맞대면’ 심판대에 오르며 1년 가까이 억류생활을 해온 것이다. 겨우 전범에서 면책되어 귀국선에 오를 때 이상문은 뼈와 가죽만 남은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 보며 쓴 웃음만 짓는 것이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그래도 죽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갓 결혼한 아내와 작별하고 부산항 제3부두를 떠나 온지 4년 만에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에 이상문은 지난 고난의 세월을 잊고 잠시나마 행복한 상념에 젖을 수 있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직 멀었지만 수송선이 일본 영토인 히로시마(廣島)의 외항 우지나(宇品)항에 기항하자 이제야 이상문은 안도의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상륙하자마자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디. 디. 티. (D.D.T.) 소독약을 뒤집어썼다. 전범추궁 작업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상문과 같은 경우가 있는 반면 동료 군속 박성근 같이 비운의 종말을 맞은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출신 군속 중 전범처형 제1호인 박성근이 자카르타 글로독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날자는 1947년 1월 5일 아침 7시였다. 사형 전날 우인 대표인 이상문(李相汶)과 박성순(朴聖淳), 군정감부(軍政監部) 종무부(宗務部) 촉탁인 고이데(小出哲天) 카톨릭 신부, 그리고 대부 자격의 마베찌(馬淵逸雄) 일본군 육군소장 등 4명이 함께 박성근을 면회하였다. 마베찌 소장은 종전 당시 제16군 예하 독립혼성 제27여단장으로서 뻘라부한 라뚜(Pelabuhan Ratu)에 사령부를 두고 서부자바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박성근이 전범재판을 받은 자카르타 전범재판소가 서부자바 관할이었던 까닭에 관할지역 지역사령관이었던 마베찌 소장이 박성근의 대부로 나선 것이었다. 1946년 12월에 일본군 한 사람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형을 당한 이후 박성근은 두 번째의 전범 처형인 셈이다. 박성근은 침통한 표정으로 마베찌 소장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각하! 이번에 사형을 집행 받게 되었습니다만, 저는 이미 4개월 전부터 각오하였기에 별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결코 비겁한 꼴은 보이지 않겠습니다. 조선인 남자로서 죽을 각오가 서 있습니다. 부디 안심해 주십시요.” 그리고는 이상문을 돌아보며, “상문 형, 너무 심려를 끼쳐드려 염치가 없습니다. 담배 한 개비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도네시아인 간수의 허락을 받아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난 박성근은, ”상문 형, 모든 것을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렵니다. 그러나…,그러나….. 개운치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썩어 없어질망정 최후까지 조국의 완전자유와 독립을 굳건히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할 말은 이것뿐입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우고 죽어간 선배들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부디 고국에 돌아가거든 분투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때 고이데 신부가 쪽지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몇 달 전 박성근이 화란 민정장관 반 묵(Van Mook)에게 상신한 탄원서에 대한 답신인 것이었다.

<박성근 귀하, 귀 청원인의 탄원은 관계요로를 통해 다방면으로 책임있는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해당되는 사유가 불충분하므로 귀관의 청원은 이에 기각하는 바입니다.
화란민정장관 비서실장>” 

박성근은 이미 고이데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있었다. 형장에 도착하자 박성근은 사형집행 지휘관인 팬 스수드 소령에게 경례를 붙이고 나서 위관장교가 인솔하는 11명의 사격수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고이데 신부는 그의 죄를 사해줄 것을 하느님에게 빌고 하느님의 축복을 주는 종부성사(終傅聖事)의 의식을 베풀었다. 스수드 소령의 허가를 받은 박성근은 침착하고 큰 목소리로 “조국독립 만세”를 삼창하고 이어, “주여, 조국동포들을 지켜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눈가리개도 없이 사격수 앞에 선 박성근은,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 영혼을 거두소서, 성모 마리아는 나를 위하여 비소서, 마리아 성총의 모친이여 인자의 모친이여, 나를 원수로부터 호위하시고 이 죽는 때에 나를 받아들이소서” 이같이 기도하면서 11발의 총탄 세례를 받았다.

현재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김동해(金東海)는 30년 전의 박성근과의 인연을 이렇게 회고한다.

“중부자바 암바라와(Ambarawa)에 있는 화란 민간인 억류소에 함께 근무할 때였지. 억류자들을 매일 한번씩 샤워를 시키는데 인원수가 너무 많은 나머지 그 중에는 개구장이 애들이 꼭 있었거던. 박성근이 그 중 버릇 나쁜 말썽꾸러기 한 놈의 볼기짝을 나뭇가지로 살짝 때린 모양이야. 그런데 그 놈이 화란 고관의 아들 놈이었던 거야. 전범재판에서 그게 꼬트리가 되어 박성근은 ‘용서받지 못할 자’의 늪에 빠진 거지.”

눈가에 이슬이 맺힌 채로 잠잠히 회고하는 김동해 자신도 억류자 학대란 죄목을 뒤집어 쓰고 전범재판에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자카르타 찌삐낭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으며 이 형무소 복역 도중에 박성근의 사형집행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김동해는 1916년 황해도 산간 벽지에서 태어나 9살에 부친을, 18살에 모친을 여의고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보통학교를 거쳐 3년제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연안군청, 황해도 도청을 돌며 농업지도원으로 종사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농촌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농업보국청년대(農業報國靑年隊)」를 결성하여 선발된 대원들을 당시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고향인 규슈(九州) 지방으로 연수를 보내고 있었다. 황해도청 농무과(農務課)에 재직 중이던 김동해도 전국에서 뽑힌 136명 대원 중의 일원으로 생전 처음 일본구경을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942년 6월 포로감시원을 지원하게 된 특이한 경우이다. 1945년 초 김동해가 서마랑(Semarang) 민간인 억류소에 근무할 당시 일본인 하사관 한 명과 단 둘이서 포로업무를 담당하였고 10여 명의 인도네시아인 병보(兵補)가 보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패전이 임박해오자 시민들의 귀를 막기 위해 1944년 6월 연합군 민간인들까지 억류하는 조치를 내린다. 억류자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게 되자 김동해의 업무도 폭주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씩 조서를 꾸미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중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꼭 있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미 일본이 곧 패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일본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 없는데 저 감시원 놈들은 지금 뭣 하는 짓거리야! 벽창호들인가 보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약을 올리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감시원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저 새끼들 꼭 원숭이처럼 생겼어……”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참다 못한 김동해는, “야! 이 새끼, 그 자리에 앉지 못해!”라고 고함을 치며 그들을 대리석 바닥에 장시간 꿇어 앉혔다. 이 별것 아닌 체벌이 후일 전범재판에서 “민간인 부녀자들을 장시간 돌 위에 꿇어 앉도록 체벌을 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중병을 앓게 되었다.”로 둔갑하여 일본인 하사관과 김동해는 전범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제로 김동해는 일본인 상급자의 눈을 피해 억류자들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꼼짝없이 10년 형을 선고 받고 말았다.

조선인 군속 중 제1호로 1947년 1월 5일 자카르타 시내 글로독 형무소에서 박성근이 사형 당한 지 7개월 후인 9월 5일 또 다른 조선인 군속 최창선(崔昌善), 박준식(朴俊植), 변종윤(卞鍾尹) 등 3인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총살형으로 처형된다.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변종윤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농사를 짓던 가장이었다. 그는 마을청년단장을 맡을 정도로 통솔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군수, 면장, 주재소장이 함께 찾아와 포로감시원 지원을 종용하였다. 마을 청년단의 리더인 변종윤을 솔선수범시키면 나머지 할당인원을 쉽게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밥상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군수 말을 거역하고 안 갈 수 있겠느냐? 가지 않으면 식량배급이 끊어질 것이 뻔한데……잘 생각해서 결정하거라.” 결국 아내와 세 살 된 재롱둥이 아들 변광수(卞光洙)를 남겨두고 1942년 9월 변종윤은 자바 땅을 밟는다. 처음 배치 받은 동부자바 수라바야 분견소에는 약 2천명의 포로가 있었으나 1943년 3월경 일부는 태국 태면철도(泰緬鐵道) 건설현장으로 옮겨가고 또 다른 일부는 일본 본토로 이송되어 나머지 300여명은 동부 제도인 플로레스 섬 마우메레(Maumere) 비행장 건설공사에 투입되었다. 변종윤은 비교적 나이가 많고 통솔력이 있어 이 플로레스 섬 포로감시원으로 파견된 30여명의 조선인 군속들의 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비행장건설이 끝나자 자카르타로 돌아가 종전을 맞게 되었고 재 자바 조선인민회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귀국의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3개월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귀국선이 출발한다는 통지서가 민회로 날아 들었다. 모두가 기뻐 날뛰었다. 4월 13일자로 민회도 공식 해산되고 가족에게 가져갈 선물을 준비하랴, 정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랴, 각자 귀국준비에 분주한 시간 속에 드디어 귀국선에 승선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간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딴중 쁘리옥 항에 나가 차례를 기다리던 변종윤에게 느닷없이 연합군 헌병들이 다가와 포로학대 혐의로 그를 연행한 것이다. 변종윤은 곧장 글로독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동료인 최창선(崔昌善), 박준식(朴俊植)도 잡혀와 있었다. 모두가 마우메레 비행장건설 당시의 동료 포로감시원 반장들이었다. 그는 아무리 기억을 짜봐도 포로를 학대한 적이 없다. 다만 질서를 어긴 포로에게 훈육차원의 벌칙으로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원한을 살만한 일이 없었는데도 포로감시원 반장을 맡은 것이 전범으로 찍힌 사유였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그는 탈옥을 시도하였다. 몰래 입수한 쇠붙이를 갈아 열쇠를 만들어 감방문을 열고 나가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건물 출입문 자물쇠를 줄칼로 절단하는 작업 도중 간수에게 발각되어 그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연로한 어머니와 젊은 아내, 그리고 다섯 살이 되었을 아들 광수 생각에 불면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편지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내면서 구명(救命)을 위한 진정서를 관계요로에 보내도록 부탁도 하여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현재 충북지역에서 고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변광수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전개 중인 법정소송 원고인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끈질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1952년 미, 일 방위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군이 관리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자연스럽게 일본정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자국출신 전범들을 ‘가석방’이라는 명분으로 대부분 방면한다. 이때 조선인 출신 전범들도 같이 풀려 났으나 이들은 일본 국적에서 제외된 채 무국적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석방 후 가혹한 생활고에 허덕이던 조선인 전범자 출신들은 그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해 권익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1955년 4월 1일, 57명의 회원으로 「동진회(同進會)」라는 친목단체는 이렇게 도꾜에서 결성되었다. 동진회의 설립 목적은 회원상호간의 상부상조와 기본적인 인권회복과 생활권 확보였다. 단기사업 목표는 원호사업을 획득하고 장기적으로는 일본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첫 번째 활동으로는 결성 23일 만에 이루어진 하토야마 이치로(鳩山威一郞) 총리와의 면담이었다. 이 면담석상에서 출소자의 의식주 해결, 한국인 전범 조기석방, 국가보상, 일본인 군인과 한국인 군속과의 차별대우 철폐, 출소 후 일정기간 동안의 생활보장 등 6개항을 청원하였다. 애초 총리와의 면담요청은 오랫동안 무시되고 있었다. 동진회는 궁리 끝에 대만출신 전범자들과 연대하여 총리관저 앞에서 연일 데모를 벌였다. 일본경찰이 강제해산을 시도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육탄으로 경찰 저지망을 뚫고 총리관저로 돌진하였다. 연일 몸을 던져 격렬하게 관저 출입문을 공격하자 국내외 언론의 취재열기는 더해 갔고 일본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일본정부는 마지 못해 <스가모 형무소 출소 제3국인 원호대책>이라는 형식적인 대책을 내어 놓았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가 취임하자 일본정부의 태도가 완화되어 면담요청에 순순히 응하며 장기적인 생활대책으로 택시운송 사업권을 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솔깃한 얘기였지만 자본금 한 푼 없는 회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때 일본인 독지가 이마이(今正之文)라는 의사가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 돈을 종자 돈으로 우선 10대의 택시를 구입하여 택시 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동진교통」의 출발이었다. 마침 일본경제가 고도성장하자 이 회사도 순풍을 타고 80여대의 택시를 보유한 큰 회사로 성장하였다. 회원들이 내 회사, 내 직장이라는 주인의식으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고객들의 호응을 받게 된 것이었다. 동진교통의 순항은 회원들의 생활안정에는 큰 힘이 되었으나 ‘국가를 상대로 한 사과와 손해배상 요구’는 별 진전이 없었다. 1965년 6월 22일 일본총리 공관에서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대일 청구권 협정체결로 개인 청구권은 최종적으로 모두 해결되었으므로 앞으로 개인적인 요구에는 더 이상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개개인에게 줄 보상을 뭉뚱그려 한국정부에게 다 주었으니 거기서 받으라는 논리였다. 난관에 봉착한 동진회는 이에 대한 돌파구를 우호적인 일본 야당 국회의원들로부터 찾고자 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국회청원’이었다. 1978년 동진회가 일본 중의원에 제출한 청원서에는 ‘보상’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넣지 않았다. 단지 한국출신 전범자들의 유골을 조속히 유가족들에게 돌려주고 그 유골을 송환할 때 유족들에게 ‘성의 있는 의례(儀禮)’를 갖추어 달라는 식의 간접적인 보상요구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청원은 야당의 힘이 미약하던 당시의 일본 중의원에서 채택조차 되지 않았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게이센죠가꾸엔 대학(惠泉女學園大) 우츠미 아이꼬(內海愛子, 『赤道下の 朝鮮人叛亂』 著者) 교수 등 양심 있는 일본 지식인들이 팔 걷고 나서 힘쓴 덕분에 중의원 담당분과인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이 청원서가 일단 통과되었다. 이를 근거로 당시 후생성 장관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 역임, 2006년 7월 2일 타계)를 면담하여 동료들의 유골을 조속히 본국으로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후생성의 입장은 보상에 관한 일이라면 한결같이 한일협정에 따라 이미 해결된 일이라며 끝까지 외면하고 있었다. 이들의 고독한 투쟁이 일본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들을 무상으로 후원하겠다는 시민단체가 등장하였다. 1991년 11월 12일 동진회는 7명의 회원들을 원고인단으로 구성하여 일본정부를 상대로 국가보상과 사죄를 청구하는 소장(訴狀)을 도꾜 지방법원에 정식으로 제출하기에 이른다. 1994년 10월 30일 법정에는 원고들의 최후진술이 이뤄지고 있었다. 먼저 동진회 회장 문태복의 소송취지 모두발언이 시작되었다.

“35년 동안의 보상투쟁이 법정으로 번진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말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소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오늘 소장을 낸 사람은 우리 일곱 명에 불과하지만 사형을 당했거나 자살한 동료들을 포함해 일본의 전범혐의를 뒤집어 쓰고 복역했던 한국인 전범자 148명이 모두 원고인 셈입니다.”

뒤이어 유가족을 대변해 고 변종윤의 아들 변광수가 발언을 이어갔다.

“지금 일본은 국제국가를 지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걸프전에서 큰 역할을 한 정치대국이 되었고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런 나라 일본을 위해 대신 희생하고 고통 당한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남의 나라 국민인 저희 부친은 일본을 대신하여 자카르타에서 총살형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불행한 유족이 더 이상 생겨나선 안됩니다. 일본 사법당국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립니다.” 이 발언은 그 다음 날 일본 매스컴에 크게 보도 되었다.

변광수의 유가족 대표 발언이 끝나자 원고인 7명의 발언으로 계속 이어졌다.

윤동혁; 징용 당시 20세, 수마트라 메단(Medan) 수용소 감시원, 아쩨(Aceh) 지역 꾸따짜네(Kutatjane) 군용도로공사 감독, 20년 형 선고

문제행; 20세, 자바지역 억류소 감시원, 전투부대 축성작업, 병보 교육대 조교, 10년 형 선고

김완근; 21세, 말루꾸 제도 하루꾸(Haruku) 비행장 건설 감시원, 10년 형 선고, 당시 민단 지바(千棄)현 지부장,

이학래; 17세, 태면철도(콰이강의 다리) 건설 포로감시원, 사형선고 후 20년 형으로 감형

문태복; 19세, 태국 포로수용소 감시원, 사형선고 후 10년 형으로 감형 
 
변종윤 (변광수의 부친)의 인적사항; 22세, 플로레스 마우메레(Maumere) 비행장건설 감시원, 화란법정에서 사형선고 받고 1947년 9월 5일 자카르타 글로독 형무소에서 총살형

그러나 원고인 7명의 애절한 갈망을 일본 사법부는 끝내 뿌리쳤다. 최후 진술일로부터 2년이 지난 1996년 9월 9일 도꾜 지방법원 민사합의 제33부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고 소송비는 원고들이 부담하라는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래도 동진회는 포기하지 않았다. 민간 시민단체와 변호인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열흘 후에 항소장을 제출하였다. 2년 여가 흐른 1998년 7월 13일, 도꾜 고등법원에 의해 항소심은 또 기각되었다. 이번에는 대법원까지 가는 상고서를 접수시켰다. 1999년 12월 20일 마지막 대법원 결심공판의 날이 밝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반 강제적으로 포로감시원이 되었고 그 때문에 심대한 희생과 피해를 본 것은 인정되지만, 당시 입법부의 재량판단에 맡겨진 일이었기 때문에 청구를 기각한다는 요지였다. 장장 35년간 일본정부를 상대로 벌인 청원활동과 8년에 걸친 법정투쟁은 이것으로 모두 끝장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피해 당사자들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하나 둘씩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 다음 호는 <한인사회의 뿌리를 찾아서> 시리즈 마지막 회로 <열대농업 전문가 신교환>과 <에필로그>로 마무리됩니다.


☞주요 참조문헌
-조선인 반란/백남철 역, 1981
-나는 전범이 아니다/문창재 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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