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4월 신성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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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성철 데일리인도네시아 대표
인도네시아 화교에게
‘황금시대’ 오나
최근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의 정관계 진출이 두 드러지고 있다. 자카르타 일부 사립학교 건물에는 중국어로 학교이름을 쓴 간판이 달려있다. 중국어 로 된 신문도 가판대에 버젓이 나와 있다. 서점에 서 중국어 교재와 중국어 서적을 흔하게 볼 수 있 다. 음력설에는 중국식 장식품과 복장이 쇼핑몰을 점령하고, 중국식 사자춤인 바롱사이는 인도네시 아 행사장에서 빠질 수 없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불과 16년 전인 수하르또 집권기까지만 해도 상 상할 수 없는 변화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정부는 중국어 학교, 중국어 신문, 음력설 등의 중국문화 를 일체 금지했었다. 또한 화교들은 국립대학 응 시, 군인 지원, 공무원 응시 등에서 제한을 당하는 등 사회적ㆍ제도적으로 많은 차별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4%인 1천만 명이 화교
통설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7세기 당나라 때 무역을 하면서 시작됐다. 중국인들이 인 도네시아로 대거 이동하게 된 것은 18세기부터 20 세기 초까지이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의 뿌리는 이주해온 시기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다수 는 후지엔, 광둥, 하이난 성 등 중국 남부에서 왔다.
첫 번째 큰 흐름은 15세기 초에 활발했던 무역 활 동에서 시작됐다. 해상무역이 발달했던 중국 후지 엔 성 사람들이 이때 많이 이주했는데, 동부와 중 부 자바섬, 수마트라섬 서쪽 해안에 자리잡았다. 이후 18세기부터는 주로 주석 광산과 고무ㆍ사탕 수수 농장 개발 바람을 타고 이주해 온 노동자들 이 대부분이다.
1740년 네덜란드 식민지정부와 중국인 충돌
무역상과 노동자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특유의 상 술과 연대 및 부지런함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자리 잡고 경제적 영향력이 커져졌지만, 그 과정에서 발 생한 현지인과의 갈등과 반목으로 인해 인도네시 아에서 내부의 갈등이 커질 때마다 표적이 됐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 식민지정부와 중국계의 갈등은 18세기 무렵 시작됐다. 당시 인 도네시아 주요 무역항이었던 바따비아(현재 자카 르타)로 들어오는 중국인 무역상의 수가 점점 많 아지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늘어나는 중국 무 역상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자연히 중국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사회적 지위 또한 높아져 네덜란 드인의 경제적 경쟁자로 부상했다.
바따비아에는 중국인만이 사는 거리가 조성되었 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일정수준의 독립된 사법권을 보장받으면서 세금 징수 업무를 대행하고 강제운반을 관리하는 실질적 실 력자로 성장했다. 또한 바따비아 인근에는 사탕 수수 농장에 대거 유입된 중국 노동력이 있었다.
1720년에 값싼 브라질 사탕수수가 공급되면서, 인도네시아 사탕수수 농장이 파산하자 일자리를 잃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비적이 되어갔다. 이에 식민지정부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스리랑카 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중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불안과 동요가 일었다. 결국 1740년 중국 이민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자 식민지정부 는 바따비아와 인근의 중국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1965년 930사태
1965년 9월 30일 밤,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은 자카르타에서 7명의 군부장성 집을 습격해 6명을 살해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수하르또 소장 이 중심이 된 우파 군부는 이 쿠데타를 빠르게 진 압했다. 수하르또 소장이 수까르노 대통령을 연금 하고 역쿠데타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1965년은 인도네시아 화교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 긴 해이다. 군부를 장악한 수하르또는 이 쿠데타 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 다. 이때 거의 50만 명 정도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 될 뿐 실제로 얼마나 많은 화교가 공산당으로 몰 려 죽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정권을 장악한 수하르또는‘중국계 동화 정책’을 펼친다. 1967년 수하르또가 내놓은 ‘중국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에 따르면 중국어로 된 공 식 문서를 폐지하고 중국의 종교 행사는 집 안에서 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중국어 학교도 폐쇄했다. 또 한 중국 이름을 인도네시아식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1998년 5월 사태
1998년 5월 수하르또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도 화교를 표적으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됐다. 아시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직후 실업률이 치솟고 가뭄과 산불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인도네시아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이런 대내외적인 상황 에서 1998년 3월 국민협의회가 수하르또의 7번 째 연임 결정을 발표하자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하르또를 둘러싼 군부세력들은 갈등을 봉합하고자 반화교 정서를 활용해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고 부추겼다. 이 때도 화교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화교의 정계 진출
수하르또가 쫓겨난 후 중국계의 수난은 끝난 듯 보인다. 1999년 총선 직후 상원격인 국민협의회 (MPR)에서 선출된 압두라만 와힛(일명: 구스두 르) 대통령은 자신이 중국계임을 인정했다. 와힛 정권은 중국계인 퀵키안기를 경제조정장관으로 선 임했고, 2004년 인도네시아 최초로 직접선거로 선
출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은 중국계 여성 마리 엘까 빵에스뚜를 무역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2012년 자카르타 지방단체장 선거에서 중국계인 바수끼 짜하야 뿌르나마(아혹)가 조꼬 위도도(조 꼬위)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자카르타 부지사에 당선됐다. 2014년 대선에서는 중국계 기업가인 하리 따누수딥요 MNC그룹 회장이 위란또 하누 라당 총재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더욱 놀랄만 한 사실은 이슬람계 미디어인 voa-islam.com의 보도다. 보아-이슬람닷콤은 가장 유력한 대선 후 보로 꼽히는 투쟁민주당(PDIP) 소속 조꼬위 자카 르타주지사가 중국계라고 보도했다.
최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은 화교에 대한 차별 논란이 되어 왔던 1967년 수하르또가 내놓은 ‘중국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을 폐지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중국의 공식 인도네시아어 명칭을‘찌나(Cina)’에서 띠 옹호아(Tionghoa, 중화) 또는 띠옹꼭(Tiongkok, 중국)으로 변경했다. 이는 최강자로 부상하는 중국 과 화교를 끌어안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최근 화교들이 인도네시아에서 황금시대를 맞는 듯 하다. 이미 인도네시아에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성공 을 거둔 화교들이 부를 앞세워 정치권에 진입을 시 도하고 사회적인 발언의 기회와 강도도 높이고 있 다. 대외적으로 지난 20여년 간 중국의 영향력이 갑 자기 커진 점도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한 화교들의 교섭력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토착민 들이 화교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불안하다. 대 다수의 화교들은 중국계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주저 하고 주변을 경계한다.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 화교 들이 일정한 부분이라도 성과를 낸다면 그들의 정 치적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2014년은 중국계 인도 네시아인에게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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